어느새 봄 기척

신춘 기별

by 무량화


겨울 한가운데이건만 서귀포 날씨는 마치 봄처럼 온화하다.


며칠 전 성산일출봉 가다가 차창밖에서 어른대는 노란빛을 눈여겨 봤더니 유채밭이었다.


바닷바람에 몸 전체로 나붓대는 가녀린 유채꽃, 여리디 여린 심성을 타고났음에도 겁 없이 삼동에 피어나다니.


같은 식물이라도 나무와 초본류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목질 단단한 나무와 달리 풀은 성정이 부드럽고 연약하다.


남성성을 지닌 기질 강인한 동백이라면 몰라도.


동백이 한겨울에 피는 데는 물론 그 나름 이유가 있다.


겨울이라는 척박한 환경을 오히려 번식의 기회로 활용하도록 진화한 꽃이 동백이다.


곤충이 활동하지 못하는 매서운 겨울에 동백꽃 화심에 부리 박고 꿀을 빠는 대신 가루받이를 시켜주는 새가 있다.


동박새다.


조매화인 동백꽃과 한겨울 동박새는 서로간의 협업을 통해 생존을 이어가는 신실한 파트너 사이다.


한라산 윗녘은 백설이 만건곤, 그럼에도 아랫녘엔

동백꽃 흐드러져 온통 붉다.


동박새를 기다리며 피처럼 붉은 단심 꽃으로 피워내는 동백.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 그런 따뜻하고 소중한 인연 있다면 심신 건강히 관리하며 살아볼 가치 충분하다.


누구나 무엇이나 나름 다 존재의 이유와 의미가 있다고 하였다.


그렇듯, 단지 같은 하늘 아래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 살아갈 이유를 준다면 그 이상 깊은 의미가 또 있을까.


은어(隱語) 같은 은유법으로 동백꽃에 간절한 시선 건네는 아침이다.



정방폭포는 걸어서 갈 만큼 거처에서 가깝다.


폭포 되어 낙하하기 직전의 물길이 흐르는 정모시공원에는 해마다 유달리 일찍 수선화가 핀다.


정방폭포 상류에 있는 용천수가 고인 맑은 연못이 정모시, 히야신스 설화처럼 물가에 갸웃 고개 숙인 채 피어난 수선화.


연연한 자태도 곱지만 은근하게 스며드는 향기 또한 일품이다.


대궁 부러진 채 땅바닥에 누워있는 수선 한 줄기를 데려와 식탁 위에 올렸더니 단 세 송이 꽃에서 신춘 기척 감지된다.


슬쩍만 스쳐도 후각 미묘하게 자극하는 향긋한 풀내가 좋아 일부러 자꾸 식탁에 나앉는다.



수선화 꽃망울 열리기 시작했으니 나비박사 석주명공원에 가면 하마 청매 폈으려나?


칠십리 시공원이나 걸매 생태공원 양지녘 청매 백매 품은 매화원보다 개화시기가 한결 빠른 곳이다.


홍매는 고매 품격 지닌 수형으로 뭐니 뭐니 해도 으뜸인 장소가 이중섭 공원.


미술관 신축 공사로 지금은 인근이 전부 다 막혀버렸지만.


정모시 쉼터에서 몇 코스만 가면 토평동 나비박사공원에 이른다.


대로변이라 접근성 좋아 금방 그 앞이다.


석주명박사 흉상 옆 길가 가까이서 청매 한 그루 떨고 서있다.


매화는 진작에 절제의 미를 터득, 꽃망울 다문다문 맺혀있다.


꽃을 피운 건 겨우 두세 송이, 그쯤만으로도 어딘가.


청매로 신춘맞이했으니 까치소리 듣듯 무언가 반가운 소식, 맑고도 향기로운 기대 걸어봄 직도.


달달한 여운 음미하며 천천히 걸었다.


이번 목적지는 같은 토평동인 유니클로 매장 뒤 농협마트 옆 공터다.


매화나무 제법 여러 그루인데 백매 몽아리 겨우 터질 듯 말 듯.

성급히 신춘을 노래하는 게 아니라, 서귀포의 겨울은 실제로 오는 듯 물러나 버린다.

하긴 앞으로 한두 차례 폭설 내릴 테지만 하귤이나 동백이나 아랑곳하지 않는 눈모자다.

여린 생명일지라도 영하권이 아닌 서귀포의 겨울이라 꿋꿋하게 잘도 견뎌낸다.

나목 가지 끝마다 내밀히 물오르고 마른 풀섶 새새로 푸른 겨울초 잎새 생기롭다.

구태여 기다리지 않아도 어느 결에 알게 모르게 봄꽃 순서대로 피어나리니...

얼음새꽃 바람꽃 만나러 한라생태숲 찾을 날도 머잖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