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 영봉에 백설 자욱한 날.
고맙게도 서귀포 시내는 날씨 쾌청했다.
먼저 들른 걸매생태공원 매화원에서 이미 흐드러지게 핀 매화를 만났다.
굳이 봄을 알리려는 의도도, 계절을 재촉하려는 기색도 없는 매화다. 그저 자연의 흐름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낼 뿐인 매화꽃이다.
그럼에도 순간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닥뜨려 아니 벌써? 싶어 좀 뜨악했다.
“댁에 매화가 구름같이 피었더군요. 가난한 살림도 때로는 운치가 있는 것입니다.”라고 쓴 근원수필을 읽으며 벚꽃도 아닌데 당대 최고 문장가가 어찌 그런 표현을... 했었다.
관념적으로 고매 등걸에 매화 보푸라기 일듯 다문다문 핀 묵화만 떠 올려서다.
그러나 매실 수확해야 하는 매화밭 정경은 촘촘히 매단 꽃봉오리 한꺼번에 만개해 정말 흰구름장 펴놓은 거 같았다.
드문드문 연분홍 매화도 있었지만 거의가 청매, 하여 매화원에 눈발 성성히 날리는 듯도 하였다.
북한산성 성벽 아래 자리한 상허 이태준의 고택, 김환기와 김용준이 사랑했던 수연산방 문득 그리워졌다.
하긴 카페로 변한 고택이니 아무리 잿빛 기와 덮어쓰고 있어도 게서 당시의 고담준론이야 들려올 리 없다만.
'邀知不是雪, 爲有暗香來.
멀리서도 눈이 아님을 알겠구나, 암향이 코끝에 스치는 걸로 미루어.
송(宋) 나라 시인 왕안석(王安石)의 매화시다.
매화원에 이르자 유현하게 스며드는 암향.
암향은 '어두운 향기'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게 그윽하고 은근스레 번지는 향기다.
특별히 매화의 향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단어가 암향(暗香)이다.
매화와 암향은 거의 동의어나 마찬가지로 한 짝처럼 쓰인다.
한겨울 시공원 사방에서는 맑고 심오한 암향 언뜻언뜻 스친다.
화려하게 드러나지 않고 숨어 있는 듯하면서도 깊은 여운을 남기는 향을 의미하는 암향.
이는 은근히 한켠으로 비켜 있는, 숨어 있는 향기다.
고개 들고 찾으면 지나치기 쉽고, 잠시 멈추어 있을 때에야 비로소 느끼게 된다.
그 향은 다만 곁에서 조용하고 다소곳하게 기다릴 뿐 누구의 시선도 가로막지 않는다.
고로 매화의 향은 후각으로 이해되는 게 아니라 감각을 따라 스며드는 느낌 같은 것.
서두르지 않는 마음, 판단을 유보한 시선, 다가서되 개입하지 않는 거리. 그런 상태에서 향은 자연스럽게 인식된다.
이번엔 칠십리 시공원 매화원으로 향했다. 양지녘이라 걸매공원보다 더 매화 화들짝 피어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꽃은 아주 성기게 피었으며 가지는 거의 비어 있었다.
어쩌면 매화는 경계에 선 꽃.
계절로는 겨울과 봄 사이, 의미로는 침묵과 환호 사이쯤일까.
여전 눈바람 시린 공기 속에서 매화는 기백으로 가장 단단한 결단을 보여준다.
맞서지 않음으로 견디고, 앞서지 않음으로 도달한다.
이는 강함의 논리가 아니라 유(柔)의 논리다.
혹한에 꺾이지 않기 위해 숙이고, 오래 남기 위해 미리 물러나 때를 기다린다.
존재는 지속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제 몫의 시간을 다함으로 완성된다.
텅 빈 채인 매화원의 살풍경은 채움으로 완성되지 않는 것일지도.
장자가 말한 허(虛)의 쓸모가 여기에도 있음이니.
그릇은 비어 있기에 담기고, 길은 비어 있기에 통한다 하였 듯이.
말없이 피고, 말없이 스미고, 말없이 사라지는 것.
하여 시공원 매화원에서 마주한 것은 삼동의 꽃이 아니라 담백한 사색의 시간이다.
무위란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아니라, 흐름을 거스르지 않음이라 하였다.
허로써 가득 차는 삶, 낮음으로써 멀리 가는 길. 매화는 그 도를 향기로 남긴다.
매화는 가르치지 않지만 나에게 질문을 남긴다. 무엇을 더하려 했는지, 무엇을 붙들고 있으려 하는지를.
갓득 冷淡(냉담)한대 暗香(암향)은 므사 일고.’
가뜩이나 쌀쌀하고 적막한데 그윽한 향기는 무슨 일인고.
정철의 사미인곡에 나오는 구절이다.
옛 선비나 문인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향보다 은은하게 스며 나오는 향을 으뜸으로 쳤다.
밝은 빛이 없는 곳에서는 형체 대신 향기와 소리로만 느껴질 뿐이다.
暗자는 그러한 의미가 반영된 글자로 '어둡다'지만 내심 유현한 의미가 담겨있다.
그리하여 바람결에 실려 있다가 어느 순간 문득 알아차리게 되는 향. 먼저 오되 앞서지 않으며, 스치되 손에 잡히지 않는다.
암향은 묵직하면서 진중해 비움과 여백의 미를 넌지시 일깨워주는 향이다.
꽃을 먼저 눈길주지 않아도 스스로 다가오거늘 성급히 품으려 들지 말고 적시거나 물들여 소유하고자 하지 말 일이다.
가벼이 나붓대는 관종과 달리 튀게 드러내지 않음으로 아주 오래 기억 가운데 남는 여운 같은 암향.
그 향은 다만 곁에서 조용히 기도드리면서 다소곳 기다릴 뿐 당신의 투명한 사유를 방해하지 않는다.
시공원 매화원에서 나는 가장 높은 차원의 삶은 어쩌면 이처럼 조용한 향기로 존재하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그 오래된 진실을 다시 배운다.
상념은 마침내 탄탄한 문장이 되어 내면 깊이 가라앉았다가, 그대 스스로를 위한 은은한 향으로 번지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