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쌓인 영봉 백록담 마주하며

by 무량화


대기 맑은 이른 아침.

규칙적인 일상의 루틴대로 현관문부터 열었다.

오랜만에 한라산이 명징한 모습으로 마주 서있다.

왕관처럼 얹힌 백록담의 설경 위엄찬 한라산.

순간 발길에 확신이 차오른다.

걸음이 빨라진다.

두둥둥 심장이 급하게 북을 쳐댄다.

벅찬 떨림 그 설렘의 감각이 살아있다는 게 그저 고맙다.

빠르게 언덕길 내려서 야자수 죽죽 뻗은 남성남로 지나 새연교에 오른다.

새로운 연(緣)을 잇게 해 준다는 새연교는 보행자를 위한 다리다.

이른 시각인데도 벌써 관광객들 다수가 들뜬 목소리로 웃으며 스쳐간다.

그들에게 '여기서 사진 찍으면 배경에 한라산이 들어와요' 오지랖 떠는 대신 한참 서서 이리저리 구도를 잡아보고 동영상도 담는다

다리 어느 지점에 이르러야 한라산 전모가 가장 근사한 프레임 안에 드는지를 알고 있으니까.

한라산 뿐인가.

서쪽 바다에 범섬 떠있고 법환포구에는 하얀 크루즈 정박해 있다.

아스라이 산방산 군산이 떠오르고 신시가지 월드컵경기장 머리도 보인다.

바로 앞은 어선 군단과 낚싯배 이마 맞대고 모여있으며 새벽마다 어판장 부산스레 경매 열리는 서귀포구다.

연륙교인 새연교 날렵한 돛폭이 청청한 창공에서 펄럭이는 듯하다.

영봉의 백설은 렌즈 안에서 머물고 그 고요는 오래도록 간직될 터이다.



다리를 건너는 동안 어떤 생각에도 사로잡히지 않으려 애쓴다.

저 아래 투명히 푸른 물결이 옛이야기들 끊임없이 풀어놓아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

드나드는 물살이 스스로를 놓아 보내듯, 가슴속에 침전된 기억의 잔해들도 날려 보낸다.

무수한 물방울이 모여 출렁대는 바다처럼, 우리 마음 역시 수많은 연기(縁起)의 흐름따라 동요되나니.

불교적 수행은 종국엔 있는 그대로의 마음과 마주하는 일, 나를 느끼고 받아들이는 거다.

무명에서 지혜로, 번뇌에서 해탈로 나아가는 인연의 길을 상징하는 다리를 걸어가며 거듭 연(緣)을 생각한다.

새연교란 이름에는 여러 뜻이 담겨 있다.

새롭다로 풀이하는 반면 새는 하늘과 땅을 자유로이 오가는 존재로, 자재로운 경지에 듦의 상징이다.

연(緣)은 뜻 그대로 모든 존재가 홀로 있지 않고 인드라망처럼 인연으로 서로 이어져 있음을 의미한다.

윤회 속에서 무아(無我)적 존재가 만나게 되는 필연적이고 운명적 관계, 이는 피할 수 없는 전생의 그림자다.

동양적 세계관에서 만남과 헤어짐을 설명하는 핵심 개념인 우연을 넘어서는 필연이겠다.

그럼에도 한 생각 고요히 내려놓고 허튼 집착일랑 흘려보내기로 한다.

고요함(靜)이야말로 마음을 정돈시키고 진리를 들여다보게 하는 깊은 우물 속이다.

그저 이제는 온전히 본래진면목으로서의 나 자신이 되어있어야 함을 깨닫는다.

이 순간, 인연으로 이어진 모든 것들에 더 이상 흔들리는 존재가 아니되기를.

바라는 것과 버리는 것 사이의 중도(中道)가 몸과 마음에 스며들기를.

어떤 의미나 감각까지도 무념(無念)의 경지에서 다스려질 수 있기를.

마음 챙김 수련하듯 텅 비워 마음 맑게 가라앉기를.

이윽고 새섬, 세속의 소음에서 벗어나 있으되 완전히 끊어지지도 않은 중도의 땅이 된 섬에 이른다.



새섬에서의 일출과 신비로운 조명쇼, 새연교에서의 일몰 풍경과 야경이 일품이라 소문난 명소인 이곳.

특히 해 질 무렵 새연교에 불이 켜지면 그것은 흔한 야경이 아니라 아직도 인연을 부르는 빛이라고 설명한다.

낮이든 밤이든 이 섬에 든다는 것은 자연과 나를 하나의 끈으로 연결시키는 일.

새섬으로 건너가 오른쪽 데크길로 들어서면 범섬과 문섬이 차례대로 눈인사 보낸다.

누렇게 시든 새섬의 들풀들은 모두 제 이름 '억새'는 놓아둔 채 바람에게 마냥 몸을 맡기고 있다.

섬에 이르러 가장자리에 멈춰 서면, 잔잔한 바람과 파도의 리듬이 자연스럽게 호흡과 일치됨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아늑한 작은 섬, 파도소리는 마음에 스며들고 그 소리는 비로소 나를 자유 공간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뜻이 이끄는 대로, 몸이 시키는 대로, 기분 내키는 대로, 맘대로.

난대림 숲길 따라 20여분 걸으며 뭇 새소리에 취해봐도 좋겠고 먼바다에서 조업 중인 선단들 바라도 보고.

아득한 수평선 마주하고 바다멍을 때리거나 심호흡 혹은 묵상에 잠겨봄 직도 한 호젓한 공간이 여기다.

그러나 내 경우 주로 스쿼트나 런지, 플랭크 응용동작 또는 고무밴드로 팔운동을 한다.

별도의 운동시설이 없는 공원이므로 목재 난간을 이용해서 도움을 얻는다.

요사이 부쩍 부각된 근 테크에 대한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안 그래도 빠지는 근육, 운동으로 지켜보려 함이다.

걷기 외에 집에서 몇 년째 절운동은 지속하고 있으나 팔 근육이 자꾸 줄어들기에 동원해 보는 안간힘이랄까.

백세시대 장수가 목표는 절대 아니다.

사는 날까지 모쪼록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다.

무조건 심신 건강 허락해 주십사 떼쓰지 말고, 이리 노력했다며 하느님께 천지신명께 아부 떨어 보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