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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y 30. 2024

군산 귀여운 왼쪽 귓속엔 무엇이?

예래마을 들어서자마자 첫눈에 사로잡힌 오름이 있었다.

군산이었다.

봉긋한 동산 위에 곰인형 귀처럼 생긴 돌출부가 귀여웠다.

어찌 보면 올빼미 귀깃 같기도 한, 양 봉우리가 유독 시선을 끌었다.

첫날은 한창인 벚꽃과 유채꽃 어우러진 예래생태공원에서 꽃에 취한 나비처럼 비몽사몽 간을 헤매었다.

벚꽃 꽃비 되어 내리더라는 소문 듣고는 두 번째로 예래마을을 방문했다.

내심 군산에 오를 작정을 하고 간 것이다.

생태마을에 들렀다가 논짓물에서 한참 동안 용천수 구경한 다음 거기서부터 군산을 바라다보며 걸었다.

불과 천여 년 전인 1007년 고려 목종 때  분화해서 생긴  오름이니 젊은 편에 속한다는 군산.

젊다고 또는 나지막해 보인다고 얕잡아 봤다가  종당에 그만 코 납작해지고 말았으니.

사전에 답사지역 기초 정보검색조차 하지 않는 버릇대로 무작정 시작한 트래킹.

나중에 알고 보니 제주 내 오름 중에서 면적이 가장 넓은 군산오름이었다.

따라서 무진 걸어야만 했다.

출발은 상예리에서 시작했는데 엉뚱하게 생판 낯선 대평리로 내려왔으니 오후 내내 발 꽤나 혹사시킨 셈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경사도 완만하고 산행로가 잘 닦여있었다는 점.

차를 타고 오르면 약 오분 정도 걸어 정상에 도달할 수 있기에  많은 이들이 찾는 군산이다.

특히 군산의 자랑인 장엄 일출과 일몰에다 화려한 야경까지 아우른다는 으뜸 명소다.




산행은 비교적 수월한 편이었다.

처음엔 335m  높이니 산책로 정도라 만만히 여기고 성큼성큼 발길에 힘이 들어갔지만
아무리 꽃길 이어질지라도 한 시간 너머 걷자 차츰 지쳐갔다.

오르고 올라도 일 차선 찻길이 오솔길로 변하고 흙길에서 계단길 되어 산길은 한도 없이 이어졌다.

점차 기운이 빠지며 올라가? 말아? 마음이 뒤엉켰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온 길 뒤돌아서 바라보면 산기슭 저 너머 탁 트인 바다 전망 너무도 아름다워 감탄사 저절로 새어 나왔다.

와우~ 저긴 송악산이고 형제섬도 보이네! 아슴하게 가파도 마라도도 짚이고.

동쪽으로는 범섬이며 서귀포 시가지가 희미하게 드러났다.

금강산도 식후경,

벤치에 앉아 간식으로 기력 보충하고 일어서는데 산불 감시원이 지나갔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하산 중이던 그는 아직도 산에 사람들이 많으니 급히 서두르지 말라고 했다.

기울어가는 해를 가늠하자니 은연중 초조할 수밖에 없는 내 기색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약간의 여유가 생겨  휘적휘적 천천히 걸어 오르다가 다시 지쳐 종당엔 터덜터덜 걷다 보니 이마 위로 정상이 나타났다.

붉은 현무암 꼭대기로 기어오르자, 아~ 그쪽은 오후 햇살 빛나는 광명천지로 좁다란 바위에 사람들이 북적거렸고 조망권 기막히게 훌륭했다.

눈앞엔 끝 모르게 펼쳐진 푸르른 태평양, 북쪽으론 한라산과 뭇 오름들,

동쪽엔 중문관광단지와 서귀포 일원, 서쪽은 산방산과 수월봉이 있는 해안에 노을빛 고왔다.

시간대 참작해 곧바로 하산을시작했다,

오던 길로 가려다 다수의 사람들이 내려가는 길로 어딘지도 모르면서 휩쓸려갔다.

도중에 물어보니 안덕으로 내려가는 도로라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길은 차를 타고 군산 바로 턱밑까지 올라가 오분이면 정상이 닿을 수 있는 최단 산행 코스였다.


그외 산책로도 여러 곳에 나 있었다.


당시야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어디든 산을 벗어나기만 하면 차도가 나타날 테고 그러면 거처로 갈 수 있다는 일념뿐.

원추형 오름이라 생각했던 바와는 전혀 다르게  동서로 길게  누은 산세라서 내리막길만도 한 시간여를 걸어야 했다.

걷고 걷고 또 걸어 대평마을에 닿았다.

차에 올라타고는 비로소 방금 내려온 군산 산행지도가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이제부터 엉겁결에 빡세게 걸었던 이날의 산행 주변부 얘기다.

예래동에 위치한 군산이나 행정 주소는 서귀포시 안덕면 창천리인 군산은 태평양을 마주 보며 서있는 오름이다.

따라서 대한민국 남단을 지키는 군사 망루 성격을 띤 곳으로 그 모양이 군막과 같다 하여 군산 또는 굼뫼오름이라 불린다.


또는 산에 어리인 기운이 좋아 상서로울 서(瑞)를 넣어 서산이라고도 한다.


문외한 눈에도 산정이 특이했듯, 지형 자체가 쌍선망월형(雙仙望月型)이라는 명당터여서 함부로 묘를 쓸 수 없는 금장지(禁葬地)이기도 하다.


'난드르'라는 품 너른 대평 들판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산이라 산세 너그러워 보이나 아픈 역사의 생채기가 남겨진 산이다.


군산오름에는 십여 개의 진지동굴이 있다.


일제는 정예 병력 7천여 명을 제주도에 주둔시키면서 해안기지와 비행장 및 작전 수행을 위한 도로, 각종 군사시설을 구축해 놓았다.


2차 대전 연합 참전국의 대대적인 폭격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진지동굴은 태평양 전쟁 막바지였던 1945년 일본군에 의해 제주도민을 강제동원하여 만들어놨다.


하늘과 바다로 촘촘히 조여 오는 연합군의 총공세로 전세가 기울 대로 기울어 거의 마지막 발악을 하던 시기였다.


가미카제 특공대를 최후의 수단으로 전선에 대량 투입하던 일본군이었다.


그들은 제주 각지의 진지동굴에 군사 물자와 보급품 등을 숨겨두는 한편 대피 시설로도 이용했다.


이때 만들어진 제9 진지동굴이 바로 군산의 왼쪽 귀에 해당,


귀 아랫부분 달팽이관쯤을 파헤치고 만든 굴이었다.


기역 자 ㄱ을 반대로 둔 형태인데 길이가 9미터나 되는 관측소 역할을 한 장소였다고.


오호통재라, 폭약 집어던지고 암벽 발파할 때 귀 멀고 말았을 군산.


일제 강점기에 제주 곳곳 산하는 너덜너덜 찢겨진 흔적 이리 많이 지녔거늘.


제주가 단순히 보고 즐기는 관광지 아닌 올곧은 역사교육현장으로 부디 거듭나기를!  


일제 진지동굴 몇 곳을 둘러보니 용처에 따라 규모 제법 큰 동굴도 있고 포복상태로나 진입할 수 있는 낮고 조붓한 동굴도 있었다.


하나같이 암벽을 쪼아 만들었는데 그 깊고 너른 굴을 정으로만 뚫기엔 역부족, 아마도 폭약을 썼을 법 하다.


발파공법도 서툰 당시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제주민이 비참하게 숨져갔을 것인가,


다시금 침략자 일본에 대한 분노가 었다.


나라가 힘 잃어 외세에 침탈 당하면 백성들의 삶은 이렇듯 참담하기 마련.


국가는 국민을 보호해야 할 책무가 있으며

개인 각자도 힘을 하나로 모아 국력을 키워야 할 첫째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호기심에 가벼운 기분으로 오른 군산오름이 주는 교훈 이렇듯 묵직하듯, 변방 섬 제주에는 다크투어 지역이 여러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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