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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Jun 20. 2024

국내 유일의 석총, 돌무덤에 묻힌 왕

삼국통일을 이룬 김유신 장군의 증조부인, 가야 마지막 왕이 영면에 든 구형왕릉 찾아가는 길은 산세 첩첩했다.


네비가 안내해 준 산청 태왕산 자락에 접어들자 태태각간이라는 관직에다 흥무대왕으로 추존된 김유신 장군이 활쏘던 터였다는 표비석이 먼저 반겼다.


그러고도 몇 굽이 산기슭 돌아 계속 올라가야 하긴 했지만 완만한 흙길은 걷기 편안하게 잘 다져져 있었다.


골짜기가 끝나는 저만치 홍살문이 보이자 타박대던 걸음걸이는 곧장 달음박질로 변했다.


이끼 낀 무지개다리 건너 산비알, 국내 유일의 석총인 돌무더기 소복 쌓인 구형왕릉이 보였다.


한달음에 내달아서, 아직도 여전 신비에 싸인채 미스터리로 남은 가락국 마지막 왕의 능앞에 섰다.


동국여지승람 31권 <산음현 산천조>에 "현의 40리 산중에 돌로 쌓은 낡은 능이 있는데, 4면에 모두 층급이 있고, 세속에서는 왕릉이라 전한다."고 기록된 바로 그곳이다.


피라미드 방식으로 일곱 단의 석단을 7.15m나 쌓아 올린 특이한 구조도 구조이지만 흙으로 봉분을 만드는 통상전례를 깬 독특한 형식의 석릉이다.


왕조가 문 닫는 마지막 순간 구형왕은 적장에게 투항하며 무슨 생각을 했기에 하필 돌무덤을 만들어 달라 했을까.


조상 전에 큰 죄인 된 자책감으로 죽어서도 포근한 흙 대신 무거운 돌 아래 깔리고 싶었던가.


아니면 나라를 지켜내지 못한 나, 눈 감거든 백성들 돌팔매질 아래 그냥 파묻히고 싶어서였을까.


능 앞에서 정면으로 마주 보이는 석릉 전면 중앙에 네모난 창이 하나 나있었는데 영혼을 읽어내는 영안(靈眼)이듯 느껴졌다.


그 창문은 어쩐지 신령한 기운이 드나드는 통로와도 같고 마음의 눈을 밝혀 과거와 미래를 꿰뚫어 보는 지혜의 눈과도 같았다.


유의미하게 지켜보자니 구형왕릉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인 듯 해, 돌무더기 사이로 뚜렷이 구멍진 창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가락국양왕릉’이라고 쓰인 비석과 상석 단정하고 좌우에는 장명등, 문무석, 석수를 세웠다.


분묘와 경계 지른 낮은 돌담은 능침 삼면을 부드러이 둘러싸고 있었다.


임란 때 왜적들이 무덤을 헐고자 돌을 들어냈더니 갑자기 뇌성이 일어나는 바람에 모두가 혼비백산 도망쳤다고 전해지는 능.


칡덩굴이 묘역 안으로는 뻗어들지 않고 새들도 능위에서 쉬거나 배설물을 떨어뜨리지 않는다는 영기 서린 구형왕릉이다.


심지어 능역의 돌에는 이끼가 덮이지 않으며 바람에 날려 다니는 낙엽조차 능에는 쌓이지 않는다니.


그 신묘함으로 외경과 숭앙의 대상 되고도 남을만하다.




때는 가락국 말기인 532년,


구형왕은 세력 막강해진 신라와 승산도 없이 싸우느니 차라리 백성들 더 이상 전쟁에 시달리지 않고 편히 살 수 있도록 그는 칼을 칼집에 넣는다


마침내 그는 신라 법흥왕에게 나라를 넘겨줄 결단을 하기에 이른다.


일설에 의하면 구형왕은 신라와 끝까지 싸우다 태왕산 부근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그때 “나라를 잃은 죄인으로 조상들 뵐 면목이 없으니 돌로 무덤을 만들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어느 왕조를 막론하고 마지막 왕은 힘이 딸려 나라를 지키지 못한 비운의 왕.


가야 마지막 왕인 구형왕은 구해(仇亥) 또는 왕위를 넘겨준 왕이라 하여 양왕(讓王)으로 불린다.


최초로 돌무덤을 언급한 동국여지승람 다음으로 조선 후기 문인 홍의영(洪儀永)이 쓴 왕산심릉기(王山尋陵記)에도 석릉 얘기가 나오며 그 주인공은 구형왕이다.


능 근처 서쪽의 폐사된 왕산사 법당 들보 위에서 이백 년 전, 한 유생이 목궤를 발견하였다. 


안에는 구형왕릉의 내력을 설명한 산사기(山寺記)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또한 목궤 안에는 구형왕과 왕비의 옷 그리고 칼, 영정 등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던 덕에 훗날까지 고이 전수될 수 있었다.


정조 때인 1793년에 왕산사 목궤에서 발견된 유품들과 위패를 봉안하기 위해 산 아래에 덕양전이라는 재실을  지었다.


이후 봄가을로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는데 그 덕양전은 시간이 늦어 그대로 패스했다.


그보다 늦은 1864년, 김정호가 편찬한 <대동지지(大東地志) >에도 "왕산사는 가야 구형왕의 수정궁터이며 그 옆의 무덤은 구형왕릉"으로 표기되어 있다.


가야는 분명 오백여 년간 한반도 남단에서 자신들의 역사를 만들어 왔던 나라다.


그러나, 흔적 남김없이 역사의 무대 뒤편으로 가뭇없이 사라져 버린 가야국이다.


역사 기록이란 살아남은 자와 승리한 자의 몫일 따름.


구형왕릉 기록 역시 사실보다는 설화에 가까울 정도로 애매모호한 구석이 많은 편이라 앞으로도 꾸준한 연구와 고증이 뒤따라야 할 터다.


몰락해 가던 가락국 귀족들이 9세기경에 왕산사를 창건하여 구형왕 관련 유품을 함께 보관하며, 이후 그와 걸맞은 구형왕의 전승이 덧붙여졌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그래서 나왔다.


허나 칠백만 가야 후손들의 정신적 고향이자 마음의 성지인 곳이기도 한 구형왕릉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도 않은 듯 찾는 이 별로 없이 외딴 장소에 유폐된 채 쓸쓸한 경내.


단순히 계절 탓일까, 지나가는 객일지라도 심사가 자못 추연했다.


구형왕릉 일대는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214호로 지정되었다.


*위치-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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