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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Jun 20. 2024

돌오름, 돌 대신 제주조릿대 자욱

창천 눈부신 주말에 돌오름으로 향했답니다.

한라산 둘레길 걸으며 돌오름길을 스친 적이 있는데 그때부터 궁금했던 오름이지요.

해발 높이는 865.8m이나 자체 높이 71m이니 야트막한 오름이라 괄시하고 그냥들 지나쳐버리는 걸까요.

아무튼 기어이 한번은 가봐야겠다고 작정했던 돌오름에 오를 기회는 의외로 선뜻 찾아왔습니다.

한라산 둘레길은 완만한 산길을 따라 걷기에 힘들지 않고 숲그늘 짙어 서늘하므로 한여름에도 걸을만한데요.

다만 멧돼지나 들개가 출몰하는 깊은 산간이라 단독 산행은 위험하다고 하더라고요.

설마, 하면서 담 크게 들개쯤 아랑곳하지 않는 만용이나 막무가내는 곤란하겠지요.

아무리 스틱을 지참한다 해도 덩치 큰 짐승이 나타나면 속수무책일 터라 아예 엄두를 못 냈던 산행인데요.



마침 황선생 직장 동료가 앞장선다기에 서슴없이 동행했지요.

든든한 길라잡이 덕에 보무도 당당히 의기양양 돌오름에 도전했는데요.

천백도로를 타고 가다가 서귀포 자연휴양림 건너편 숲에서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했답니다.

지난번에는 한라산을 머리띠처럼 둘러싼 임도 따라 산행했는데 이번엔 초입부터 거친 산길로만 접어들더군요.

울퉁불퉁한 화산암 위로 야자 매트가 쭉 깔려있어도요.

잡목 언덕과 계곡이 번갈아 나타나 들쭉날쭉 매우 험한 길이었지요.

곶자왈처럼 얼크러 설크러진 짙푸른 숲엔 더구나 지난 태풍 때 부러진 삭정이들이 어수선하게 깔렸더군요.

단풍 들면 멋질 거 같은 졸참나무, 서어나무, 단풍나무숲 지나 훤칠한 삼나무 조림지 사잇길도 걷게 되었고요.

그런 산길을 한 시간 가까이 걷자 비로소 아는 길이 나타났는데요.



반석 같은 바위 멋대로 널브러진 기나긴 하상 낭떠러지에 수평으로 얇게 갈라진 판상절리대에 닿았던 거지요.

드디어 거기서 한참만에 시리도록 파란 가을 하늘과도 조우했더랍니다.

숯가마터도 기다려 주었고 엎드린 개구리 혹은 물개와도 같은 강생이바위 지나서 표고버섯 농장도 만났고요.

바윗 덩이가 무리 지어 길게 꿈틀거리는 용바위도 다시금 반겨주더군요.   

그러나 길섶 축축이 젖은 진창 곳곳에는 멧돼지 놀던 자취가 고스란히 찍혀있기도 했지요.

멀지 않은 곳에 멧돼지가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와락 섬찟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하지만 그 느낌은 해맑은 멧새소리가 곧바로 희석시켜 주었답니다.

그렇게 걷고 또 걸어 비로소 한라산 둘레길 편편한 삼거리에서 돌오름 방향 쪽으로 들어섰습니다.

얼마 동안 송이가 깔린 똑 고른 편백나무 숲길이 기다리고 있었지요.

다시 삼거리가 나오며 비로소 돌오름 오르는 길 표식이 나타나더군요.

어렴풋이 길 흔적이 나있는 초입 상태로 보아하니 거의 사람들이 다니지 않은 길 같더라고요.

약간 경사로이나 계단은커녕 그 흔한 야자 매트도 깔려있지 않은 생땅이 일면 반갑기도 했지요.

유독 많은 단풍나무 서어나무 때죽나무가 서로 키재기를 하는데 엊그제 폭우로 흙이 유실된 터라 굵은 뿌리가 마구 드러나 있었고요.

중간중간 느닷없이 나타나는 키 큰 제주조릿대 자욱한 숲길 어찌나 빽빽하던지 어휴~ 소리가 절로 나오데요.

앞서가며 길 터주는 동행자가 없었다면 전진한다는 건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였어요.

황선생과 둘이 왔더라면 어깨 가까이 차오르는 밀밀한 조릿대 틈을 빠져나갈 용기가 없어 돌오름 등정은 그만뒀을걸요.

실제 땅바닥도 전혀 보이지 않는 길을 대강 어림잡아 치고 올라간다는 건 모험에 가까우니까요.   

더구나 산행인이라고는 산에 오르는 내내 한번도, 아무도 만난 적이 없으니 오죽 휘휘했겠나요.

겨우겨우 조릿대 지대를 빠져나오자 키 낮은 잡목림이 뒤엉켜 있는 곳에 당도하게 됐고요.

그제사 머리 위로 푸른 하늘이 보이더군요.

산정에 거진 다 왔다는 신호이지요.

안도감이 들면서 그때사 시장기 심해져 나무뿌리에 걸터앉아 늦은 점심을 먹었네요.

거기서 충분한 휴식 취하고는 다시 행장을 챙겼지요.

곧이어 정상이라고 하긴 그렇지만 굼부리 느낌이 드는 형태의 평지에 이르렀는데요.

덩치 커다란 바위가 네댓 개 제멋대로 널브러져 있길래 이래서 생긴 돌오름 명칭인가 했지요.

아무튼 돌오름에는 제주조릿대만 자욱할 뿐, 돌은 이들이 전부였답니다.

에게게~뭐야! 왠지 싱거운 기분이 들기에 거기서 멈출 순 없었지요.

흐릿하나마 빙 둘러 난 길의 흔적을 따라 걸어 나가자 전망 툭 트인 진짜 돌오름 산정이 있더라고요.

동북쪽으로 앙바틈하게 겨우 숲이 터진 사이로 한라산 정상도 보였지요.

안내판에는 해발고도 866m로 나와 있고 주소지는 서귀포시 안덕면 상천리까지만 쓰여있었습니다.



돌오름길 표식은 한라산 둘레길 여기저기 동원됐으나 정작 돌오름에 대한 정보는 알뜰하게 비어있는 이곳.

한라산 둘레길 2코스 명칭도 '돌오름길'이건만 돌오름은 싹 제외돼 버렸길래 경사도 심하거나 산길 꽤 험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요.

나름 한라산 조망권도 괜찮은 데다 산이 가파르거나 전혀 힘들지도 않은, 순한 오름인데 왜 오지처럼 방치시켰나 모르겠더군요.

한라산 주변부 전부 훑은 건 아니나, 다녀본 중에서 가장 깊이 숨어있는 오름이자 전혀 다듬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오름이 여기 아닌가 싶데요.

사진에서 보다시피 저만치나 멋대로 크게 자란 제주조릿대 어디에선들 본 적 있나요?

너무 호젓하도록 시선에서 벗어나 순결이 남아있는 오름이라 오죽하면 순 처녀지를 개척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니까요.

하긴 있는 대로 자연 파헤치고 들쑤셔 개발만 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지만요.



한라산과 마주한 곳이니 틀림없는 오름의 정상부.

중심에 한라산을 넣고 인증샷 한 장 찍고는 그 자리를 떠났는데요.

왼쪽으로 희미하게 나있는 길을 따라 하산하기 시작했지요.

우리 일행이 오전에 올라갔던 길을 되짚어 내려오는 데는 별로 어렵거나 시간 오래 걸리지도 않더라고요.

조릿대 우거진 길목만 앞을 틔워가며 걷느라 주춤댔지만요. 거길 지나자 숲길 금세 내려와 어느새 삼거리길로 나서게 되더군요.

앞으로는 거의가 부담없이 걸을 수 있는 평지길, 한라산 둘레길과 바로 연결되거든요.

여기선 훤칠한 편백나무 면역력 강화를 도와주는 피톤치드 샤워로 심신 상쾌해졌고요.  

이어서 단풍으로 만산홍엽 불타오를 때 필히 찾아와야 할 잡목 숲 계속되었어요.

숲 속 멧돼지 놀이터와 표고재배지를 지나고 용바위, 강생이바위 스쳐 편상 절리대도 패스하고 숯가마터 기웃거린 다음부터는 걷기에만 주력했네요.  



오전 열 시부터 숲에 들어 한라산 중허리 천 미터 고지인 산자락 마냥 여유작작하게 훑고 다녔더니 그새 오후 세시가 넘었더라고요.

여긴 이미 낯익은 산길이라 약간 속도를 내, 안전한 야자매트길 오르내리다 드디어 한 시간쯤 만에 차있는 곳에 도착했답니다.

그 자리에서 중앙로터리까지야 삼사십 분 거리라 집에 다 온 거나 진배없지요.

이 하루도 아주 특별히 기억될 날, 대여섯 시간 산뜻 경쾌하게 숲길 걸으며 한라산 아래서 노루처럼 즐겼거든요.

여기서 중요한 건 아무 데도 매임 없이 자유롭게, 시간을 최고로 즐겼다는 느낌 그  자체이지요.

맘 내키는 대로 하고 싶고 좋아하고 잘하는 일(짓)을 하면서 살 수 있는 건강한 일상이라면 뭘 더 바라겠나요.

행복이 별건가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자 자신 있는 일에 몰두하다 보면 매 순간 만족스럽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런 충만된 기쁨들이 모여 만들어지는 게 행복, 그대들 모두도 부디 누릴 수 있기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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