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량화 Jul 07. 2024

몽심재에서의 이박삼일

몽심재는, 조카네 두 아이랑 녀석들의 절친 가족과 나를 포함 열한 명이 찾아가 2박 3일을 지내고 온 곳이외다.

조카는 4년간의 샌프란 파견근무를 마치고 귀국해서 한동안 의기소침에 빠져있었다오.

어른 아이할 거 없이 현실적응이 어려워 우울감에 젖은 채 매우 힘들어했던 것이라오.

그때 친우 권유로 온 가족이 몽심재로 쉬러 갔다가 새 에너지 가득 채워 충분히 만족하고 돌아온 조카였소.

이후 가까운 이들에게 이곳을 최상의 찬사 얹어 소개하고 안내도 하더이다.    

서울에서 남원까지는 그리 가까운 거리도 아닌데 말이외다.

어둘녘을 지나 깜깜 밤에 가로등도 없는 촌길을 들어가는데 사위는 적요하다 못해 괴괴할 정도여서 어쩐지 으스스했소이다.

고택에 당도하니 알전구 빛 희미한 외엔 인적은커녕 아무런 사람 사는 기척조차 없었소.

잠시 문명세계와 유리된 막막한 기분조차 들었다오.

몇 차례와 본 조카가 익숙하게 선도해 짐보따리를 방에 들여놓은 다음 세면대와 화장실 위치도 알아뒀소.  

방에선 오래 묵은 흙집에서 나는 특유의 퀴퀴한 내음이 배어 있었으나 욕실 설비는 현대식이라 깨끗했소.

고택의 여러 빈방들, 옛 정취 가득한 집에서 홈스테이를 원하는 이들에게 빌려주려니 일부 시설을 보강한 모양이었소.  

너른 마당의 어둠이 낯선 아이들에게 "하늘 한번 바라보렴" 했더니 일제히 고개를 들자마자 한결같이 외치더이다.

와우~사방 어디에도 한점 불빛 새어 나오지 않아 더더욱 새카마니 칠흑 같은 천공.

하늘 한가득 영롱하게 반짝대는 별을 보자 폴짝 뛰어오르며 모두들 환호 보냈소.

그랬소이다.

도회에서만 살았으니 초롱한 별이 총총 뜬 황홀스러운 밤하늘 감상은 상상도 못 하였던 터.

아이들은 별자리를 찾아보며 시골에서 맞는 밤을 너무도 감격스러워하였소.

고흐가 그린 별밤, 알퐁스 도오데가 쓴 프로방스의 밤송이 같은 별을 아이들이 생전 구경해 본 적이 있었으리까.

그 순간 한 아이가 별밤에 취해 부르는 아름다운 뮤지컬 한 소절을 들었소이다.

이미 초등학교적부터 뮤지컬 동아리 리더로 영어 뮤지컬 공연을 했었다는 외고 2학년 생 하연이.

미리 준비해 온 전자 키보드가 등장했고 기타를 들고 나온 다른 집 여학생이 이어서 랩을 하자 다 같이 따라 부르며 분위기는 점차 고조,

즉석 명명된 별밤음악회가 열렸다오.

누마루에 둘러앉은 엄마들은 일제히 손뼉 치며 흭흭~ 휘파람으로 뜨거운 환호를 보냈소이다.

아이들을 공부로만 몰아가지 않고 각자 재능을 펼쳐나가도록 후원해 준 엄마들에게도 나는 진정 어린 박수를 보냈소.

고택에서의 첫날밤, 이웃들 생각해 너무 늦지 않게 음악회를 마무리하고 모두들 각자 방에서 고단한 잠에 빠져들었다오.

물론 둘째 날 밤에도 초등학교 5학년 생부터 여고 2년생으로 다양하게 구성된 재능꾼 모임은 더더욱 열기 불을 뿜는 가운데

낭만 어린 별밤 캠프를 환상적으로 펼쳤음은 물론이오.

이튿날 부옇게 여명이 트이는 새벽, 뭇새소리에 잠이 깨었소.

창호문을 살그머니 열고 밖으로 나와 집 안팎을 찬찬히 둘러보았더랬소.

우리가 휴식을 취한 방은 말하자면 사랑채, 대문에 딸린 문간채를 지나 약간 경사진 안뜰을 거쳐 사랑채, 그다음 중문을 통과하면 안채.

그리고 장광과 채마밭이 있는 뒤란터는 동산과 이어져 있더이다.

마루에 걸려있는 사진은 전쟁 후 쇄락해진 몽심재와 인근 부락 모습인데 지금은 모두 다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었소.

전북 남원시 수지면에 위치한 몽심재 (夢心齋)는 중요 민속자료 제149호로 문화재청 관리를 받는 곳이었소.

몽심재가 있는 마을은 죽산 박 씨 집성촌으로 종갓집이 바로 몽심재 곁에 있더이다.

죽산 박 씨가 남원에 들어온 것은 송암 박문수의 손자인 박자량(朴子良) 시절이었다 하외다.


 한성 판윤이었던 그는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켰을 때 전라 관찰사로 내려왔다가 관직의 뜻을 접고 처가 동네인 이곳에 눌러앉았다 하더이다.

여기서 송암 박문수(松菴 朴門壽, 시호는 忠顯)는 우리가 아는 어사 박문수가 아니라 고려 말 조선개국을 반대하고 숨어든 두문동 72현 중 한 분으로, 몽심재의 몽자와 심자는 송암 박문수의 시 가운데서 끝자를 취해 만들었다 하오.

"隔洞柳眠元亮夢(격동류면원량몽)

登山薇吐伯夷心(등산미토백이심)

마을을 등지고 잠든 수양버들은 도연명(元亮)을 꿈꾸는 듯하고/산속의 고사리는 백이의 마음을 토하는 듯하다." 란 원문을 통해서도 난세를 등지고자 한 그의 마음이 읽히더이다.

몽심재를 세운 이는 박문수의 16대손으로 만석꾼인 연당 박동식(蓮堂 朴東式, 1763~1830)씨.

이후 몽심재 주인들은 후손들로 이어지다가 근래에 관리가 어렵게 되자 원불교 재단이 맡게 되었다 하오.

굵직하게 양각되있는 존심대
자그마한 사각 연못, 천운담

조선시대 대갓집들은 사랑채 축대를 높이 올려 계단 수 많을수록 집의 품격도 높아진다고 여겼다 하더이다.

마루를 내려와 댓돌에서 다시 높직한 돌층계를 밟고 여러 계단 내려가야 마당인데, 한 단계마다 아주 너른 보폭을 요하므로 매번 얼마나 조심스레 걸음을 옮겨야 했던지 모른다오.

몽심재는 조선 후기 양반가의 전형적인 주택양식을 잘 보전하고 있는 주택으로, 집터가 풍수지리학상 호랑이 머리 부분에
해당돼 집안에서 걸출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하오.  

특히 이 집에서 주목할 부분은 문간채 그리고 마당에 박힌 우람한 바위였다오.

통상 행랑채로도 불리는 문간채는 아랫사람들이 거처하는 곳인데 특이하게도 문간채 누마루 앞에 작은 연못 천운담(天雲潭)을 만들어놓았더이다.

사방에서 빗물이 흘러들었다가 가득차면 흘러나가도록 배수구까지 만든 과학적인 배치도 배치지만, 양반가 연당은 쥔나으리
운치 어린 풍류 돋우고자 후원에 만들어 즐기기 마련인데 이 장소는 퍽 의외였소이다.

엄격한 반상 신분사회였던 조선조인데 천운담을 조성하며 행랑채 사람들까지 두루 아우르다니.....   

원래부터 인품 남다른 쥔장은 상하의 벽을 허문 분이자 남도에서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가는 과객들에게 후하게 대접하기로 소문난 분이었다 하오.

윗대가 덕 많이 쌓아 복지은 훌륭한 가계라서 인지 대대로 판검사가 줄지어 나왔답디다.

안뜰의 큰 바위는 기가 세기로 이름나 여기서 기를 받은 다음 자손을 갖게 되면 큰 인물이 난다 하여 신혼여행을 오는 이들도 더러 있다 하더이다.

범상치 않아 보이는 그 바위 전면에는 굵직한 양각/음각으로 새긴 문구인 주일암, 정와, 존심대 등이 있는데 이중 존심대는 存心養性 修心養性(존심양성 수심양성)에서 빌린 글귀라 하더이다.

그 뜻은 맹자왈 " 자기 본심을 간직하고, 자기 본성을 기르는 것이 바로 하늘을 섬기는 것이다"라는 의미라 하였소. ​​

중문 지나 안채로 들어서자 맞은편 담장가에 실하게 열매 매단 대추나무, 그 옆의 잘 생긴 굴뚝이 먼저 눈에 들더이다.


또 하나 독특한 점은 부엌 위에 누다락 같은 방이 있고 2층 덧마루가 조붓하게 나있었소.


유년기 외가에서 보았던 과방, 잔치나 명절 때 갖가지 음식을 만들어 보관도 하고 접시에 담아 상을 보던 일종의 고방인데


여기선 누다락이 차를 나누며 담소하는 차실로 쓰이더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우리가 묵는 동안 문화재청에서 인부들이 와서 목재로 된 고택 안전관리를 위해 CCTV 설치하느라

불도저가 쿵쿵 부산을 떠는 터라 바로 옆의 종갓댁으로 마실 갔소이다.


고풍스러운 종가 대문 위 삼강문이란 편액이 붙은 우측 편, 붉은 현판의 흰 글씨가 눈에 확 띄더이다.


제 본관인 능성이 나오고 잇따라 구 씨 열녀지각이란 글이 있기에 자세히 알아봤더니, 왜적과의 전투 중 남편이 목숨을 잃자 아내가 은장도를 꺼내 들었다는... 아, 모질게 독할손 열녀 구 씨여!


박자량의 후손 박계성은 임란 때 의병을 일으켜 권율을 도왔으며 그 후 한성판관에 제수되었는데 다시 정유재란 때도 왜군들과 맞서 싸우다가 율치전투에서 전사하였다 하오.


박계성의 아우 승성과 태현 등도 순절했는데 남편의 전사소식 듣자 부인은 종문에 고하고 자결, 종가 대문에 삼강문(三綱門) 현판이 걸리게 되었다 하더이다.


충신, 효자, 열녀가 배출된 가문임을 뜻하는 삼강문이 아니오이까.


몽심재에서의 이박삼일, 깊은 밤이면 일체의 소리가 차단된 적막강산 같은 고요를 모처럼 만끽하였소이다.


동시에 구김 없이 맑디맑은 재간둥이 청소년들과 동행해 판타스틱한 별밤공연 축제를 고택에서 즐긴 기억, 오래오래 미소로 남을 것이외다. 2020

<마루에 걸린, 동란 후 쇄락해진 몽심재 예전 사진>


 


  

작가의 이전글 수애기로 행복 잠시, 뿔 났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