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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Jul 14. 2024

정월소

절벽 아래 망망대해로 몸을 날리는 빠삐용. 그는 상어 떼와 큰 파도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탈출에 성공하지 못한 절해고도의 감옥으로부터 마침내 벗어난다. 어이없게도 생의 대부분을 억울한 옥살이로 보내야 했던 그는, 자신이 유죄라면 시간을 허비한 죄 밖에 없다고 자조하듯 뇌까린다.



빠삐용은 끈질기게 탈출을 시도했다. 도전 그리고 또 도전. 나에겐 그 시도마저 없었다. 아니, 자유를 향한 비상의 꿈조차 갖질 못했다. 아직은 그럴 시기가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여건이 성숙되지도 않았거니와 지금은 도전해 봐야 완고한 벽 앞에 번번이 좌절 겪고 말 것이므로. 지금은 외양간에 고삐 매인 소처럼 하릴없이 누워 되새김질이나 하며 그냥 세월 흐르기만 기다릴 따름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무의미하게 낭비되는 시간만은 물론 아니다. 결 가다듬는 비상의 나래가 내밀히 준비되고 있으므로.


태생이 소띠에 정월생이다. 역학 보는 이가 들으면 부모 인연이 어떠하고 배우자 운이 어떻겠다는 개괄적인 풀이를 하겠지만, 기실 운명이란 불가항력적인 면도 있으나 그보다는 스스로 개척해 나갈 수 있는 소지가 더 많은 것이다. 어떤 사주를 지니고 태어났든 그에 구애됨 없이 자신의 삶은 자신이 창조해 나가야 하는 것.


어쨌거나 나는 소치고는 절기적으로 한가한 철에 태어났다. 김 오르는 여물이나 우적거리며 게으르게 누워 지내도 좋은 게 정월소다. 일없이 빈둥빈둥 무위도식하는 나날. 그야말로 게으름의 극치다. “너의 나태가 빈한을 초래하나니” 이는 어느 교회 앞을 지나다 본 설교 제목이다. 마치 나를 향한 조용한 훈시 같아 목이 움츠러들었지만 그러나 어쩔 수없다. 해동이 멀었으니 논갈이 나가기에도 한참 기다려야 한다. 겨울이라 파리 떼가 없으므로 꼬리마저 한유롭다. 가끔씩 눈망울 꿈벅대다가 심심하면 목에 달린 워낭을 흔들어 본다. 딸랑거리는 방울소리의 울림이 맑다.


정월달은 한겨울이다. 은둔과 침잠이 어울리는 계절이다. 소 역시 마찬가지로 한점 정물되어 살아간다. 겨울철 소가 할 일 이란 그저 먹고 자는 일뿐이다. 싱싱한 풀을 못 먹는 것이 아쉬우나 대신 콩깍지며 볏짚 고구마 따위 먹거리는 아직 넉넉하다. 그렇지만 단지 먹기 위해서 생존하는 삶이란 어쩐지 좀 딱하다는 생각이 든다. 살아있는 존재라면 당연히 움직이는 활동. 나아가 몰두할 수 있는 일을 필요로 한다. 기왕이면 보람 있는 일, 가치 있는 일이라면 더 좋으리라.


실상 노는 것도 고역이다. 하는 일없이 지낸다는 것은 사람을 맥 빠지게 하는 노릇이다. 무기력에 가깝게 쳐져 있는 자신. 거의 탈진 상태에 빠져 매사 의욕도 없고 꼼짝하기가 싫다. 우울증에도 이런 단계를 밟으며 오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잠은 여전하다는 점이다. 숙면마저 못 이룬다면 까다로운 병이 되겠지만 시도 때도 없이 잠은 잘도 퍼붓는다. 은혜라면 은혜다. 나는 게을러빠진 잠 많은 소일 따름인가.


초식동물이 대개 그러하듯 소는 순한 짐승이다. 스페인의 투우처럼 격렬하게 살다가는 소도 있지만 거지반이 온순한 편이다. 미련스럴 정도로 우직하고 단순하기도 하다. 아니 의젓하고 점잖다. 도무지 흥분할 일, 화급한 상황이란 없다. 어찌 보면 천하태평, 무욕으로 사는 수도승 같은 소. 바위처럼 묵묵하고 어떤 경우에도 불퉁스럽지 않다. 참을성이 많은가 하면 힘도 세다. ‘소가 크면 왕 노릇하나’ 하듯이 덩치 크고 강건한 힘이 있을지라도 소는 대장질은커녕 식민지 백성마냥 죽어지낸다. 유순한 노예요 순종하는 하인 격이다. 맹목적인 저자세 같아 답답한 우공아! 싶기도 하다. 그러나 소의 깊은 심지를 누가 헤아리랴. 해와 바람의 내기처럼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꺾는 이치를 터득하기 전에야. 영국에 맞서 비폭력 무저항주의를 내건 간디의 생애가 떠오르기도 한다.


요즘 와서는 경운기에 일을 떠넘겼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래질에서부터 우마차를 끄는 신역 고된 막일꾼이 소였다. 그러면서 체질을 당하고 거친 먹이로 연명해 가는 안타까운 목숨이었다. 아무리 고달파도 내색 없이 따르며 제 한 몸 아끼지 않는 소는 인내의 상징이다. 신으로 떠받치며 최상의 대우를 받는 인도소가 아닌 다음에야 실컷 부림만 당하고는 종내 밀려나는 곳이 사람들의 식탁이다. 고기와 젖은 유용한 단백질 공급원이 되는 것이다. 심지어 내장과 뼈며 꼬리에다 투박진 발에 이르기까지 전신을 알뜰히 사람에게 다 바치는 소. 화각공예로 세공되는 뿔, 구두와 옷이 만들어지는 가죽 털 등 어느 한 부위도 쓰이지 않는 데란 없다

.
이렇듯 소는 가축 중에도 사람을 가장 많이 돕는 짐승이자 온몸으로 헌신 봉사하는 갸륵한 동물이다. 길마를 지우면 얹힌 대로, 써레를 끌라면 또 그대로 도대체 꾀부릴 줄 모른다. 아무리 심하게 혹사당해도 여간해서 불평이 없고 거부할 줄 모르는 오직 인종뿐이다. 내 주장이 애당초 없고 따라서 고집도 없다. 황소고집이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어찌 좀 뻗대 보다가도 길들인 주인의 이랴! 소리 한마디에 순순히 잘만 따른다. 여태껏 주인에게 불충한 소란 없었다. 혹간 고집이 몹시 센 사람을 일컬어 소 멱미레 같다고 하지만 이는 소의 턱 밑에 있는 질긴 고기에서 유래된 말이지, 실제 소라는 짐승은 순하디 순한 눈매대로 심성 또한 어질다.


완만한 동산 아래 지붕 둥그런 초가가 앉았고, 그 집의 제일 큰 재산인 누렁 송아지가 외양간을 지키는 농촌 풍경은 한갓 전설이 되려 한다. 동시에 꼴 베는 초동의 풀피리 소리도 사라진 지 오래다. 산간 다랑이 논이나 쟁기가 필요할 뿐 기계화된 영농에 소는 제 역할이 없어져 버렸다. 옛날처럼 농경에 동원되고 달구지를 끌어야 하는 다목적 용도의 소가 아니라 다만 피둥피둥 체중이나 늘리면 된다. 부드러운 육질에 채산성을 높이고자 배합사료 먹여 키우는 요즘 소다. 집단으로 사육되는 소는 이제 돼지와 별반 다르지 않은 행로를 걷게 된 셈이다. 그러니 소도 그전 소가 아니다. 네덜란드가 원산이라는 얼룩 젖소 홀스타인은 흔해도 누런 토종 한우 보기가 쉽지 않은 세상이다.


정월소가 옛적 소로 돌아가고자 반기를 든다. 무료에 지친 정월 소의 반란이다. 더 이상 하는 일없이 어슬렁거리며 허송세월하는 소의 일상이 싫다.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탕진하기는 싫은 것이다. 부지런한 원래의 소, 근면 성실의 표본인 옛날의 소로 돌아가고자 한다. 역할이 주어진 소, 낱낱의 세포가 깨어 약동하는 보람찬 소의 생애를 살고 싶은 것이다.


푸른 들판의 풀을 마음껏 뜯으며 무논에 들어가 보습 끝에 갈아엎어지는 흙냄새를 맡고 싶다. 달구지 끌고 힘든 비탈길 땀 흘리며 오르고 싶다. 힘들게 일한 만큼 마땅히 주어진 성찬 앞에서 맛보는 뿌듯한 포만감. 그 삶의 순수한 희열을 내 것으로 하고자 한다. 땀 흘린 뒤 개운한 휴식에 들어 단잠에 취하고자 한다. 괴테의 말이던가, 시간을 짧게 만드는 것은 활동이고 견딜 수 없도록 지루하고 길게 만드는 것은 나태라고. 게으름은 녹과 같아 오히려 자신을 상하게 한다. 일 없이 지내는 것은 바쁜 일에 매이는 것보다 도리어 자체 소모를 빠르게 진행시키고 사람을 빨리 시들게 하는 법이다.


정월소가 잠을 깬다. 일을 찾아서 대지를 박차고 힘차게 일어선다. 근육에 힘이 오른다. 팽팽한 긴장감과 탄력감이 감돌며 전신을 활기차게 만든다. 나 어쩌면 전생에 소였던가. 다랑이 논을 가는 황소든, 알프스 초지에서 노니는 소든, 아메리카 원주민이 방목하는 소든, 그들 목에서 딸랑대는 방울이나 워낭소리가 마냥 좋을 뿐 아니라 아득한 향수조차 느끼는 나는.    

«97 현대수필»

<결국 나불대며 까불다 이민 와서 된통 노동의 진미 맛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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