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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Jul 14. 2024

자랑질

시방부터 아주 펴놓고 자랑질 좀 하려구유. 눈꼴 신 자랑질은 아니니께 봐줄 만할 꺼구만유. 사실 이런 자리 아니믄 어디 가서 이 유창스런 한국말루다 사진도 곁들여가며 자랑을 늘어놓을꼬 싶네유. 독수리 타법으로 눌러대는 카톡은 감질만 나구유. 뉴저지 칭구랑 아쉬운 대로 전화루 수다 떨기도 하지만 눈 허벌나게 쌓인 동네에다 대구 괜히 약 올리기두 그렇구유. 더구나 시각적 전달방법이 없으니 형용사 마구 동원시켜 설명으루 대체하다보믄 내 얘기만 주구장천 길어지잖어유. 이웃사람들 하군 자랑질은커녕 "유기농 채소인데 시금칫국 끓여 먹던지 야채 샐러드 해 먹게 좀 줄까?" 하는 소리조차도 버벅대느라 얼굴 붉어질 수준이니..... ㅠ

보시다시피 텃밭 식구들이 여름날 숲처럼 무성하니 푸르릅니다. 첫아이 육아일기 쓰는 엄마마냥 나날이 자라는 채소들 모습을 흥분되고 설레는 기분으로 지켜보던 그간의 충만감이라니. 아주 어릴 땐 너무 귀하고 이뻐 어느 하나 솎아내려두 손 옭말리기부터 했구유. 좀 더 자랐을 때두 나 먹자고 선뜻 뽑아내기 아깝고 애틋했는데 이제는 풋풋하니 의젓한 청소년기에 이르렀네유. 요즘엔 마켓 가도 야채부는 흘깃 스쳐 지나쳐유. 텃밭에 풍성한 열무, 배추, 상추, 시금치, 겨울초... 쌈 채소로 겉절이로 국거리로 나물 무침으로 각각 입맛대로 준비되어 있으니께유. 날씨까지 봄처럼 따스하니 야채들이 얼마나 쑥쑥 잘 자라는지 솎고 또 솎아줘도 금세 수북해지네유. 어쩌면 텃밭 푸성귀들은 아끼는 노리개이자 어여쁜 장난감, 나아가 소중한 분신처럼도 여겨져유. 고슴도치도 지 새끼 함함하다는디 팔불출 마다하지 않구설랑 얘네들 자랑질하고 싶은 이 마음 헤아려지나유?



채소들이 무럭무럭 자라니 고랑마다 잡초 역시 덩달아 무성해집디다. 예전에 보리밭 매고 뒤돌아보면 금세 또 풀이 돋아있더라는 말 허풍 같았는디유. 아침에 풀 뽑아주고 오후에 가보면 언제 김맸나 싶게 잡초가 자라있더라구요. 그러니 자그마한 밭뙈기 건사하기도 여간 일이 아니더라니께유. 그래두 꽃밭 가꾸듯, 정원 다듬듯 채전을 돌보는 낙은, 일상에 작은 행복을 보태주구유. 울 동네 교우분은 밭농사를 짓기에 채소를 나눠먹을 필요가 없어유. 노인 아파트에 사는 한국 분이라도 알면 보내련만 전혀 모르겠구유. 대신 러시아 학우에게 시금치 뽑아주고 친구 딸이 놀러 왔기에 실한 걸로 골라 풋배추를 솎아줬지유. 딸내미 이웃에 나눠주라고 보내기도 했지만 지난 일요일엔 태고사 절에두 보냈네유. 물이 귀한 곳이니만치 깨끗하게 씻어 한 봉다리 전했더니 씩씩한 여스님이 여간 좋아하지 않더라구유. 아마도 단순히 먹거리를 얻기 위해서만 이 일을 한다면 보람스런 취미 즐기기가 아니라 노역이 되고 말 테지유.



자동차 운전석은 우측, 보행자는 좌측통행이 당연한 우리두 영국이나 일본에 가면 우측통행을 해야 해유. 어디서나 똑같은 법칙이 적용되는 것만은 아니거든. 춘삼월에 씨앗 뿌리는 일이 당연한 건 한국에서나 동부의 일, 서부로 이사 와서는 시월 말에 채소 씨앗을 뿌렸네유.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 했잖. 물론 시행착오가 있긴 했쥬. 이삿짐 풀자마자 밭 일궈 부지런 떨며 씨앗을 뿌렸는디 알고 보니 소용없는 짓이더라구유. 사막 날씨에 채마밭을 가꾸려면 불볕더위가 지난 다음에나 가능하구유. 여름엔 물값 장난 아닌 다 해충 무진 꼬인다네유. 인디언섬머가 지나구 시월도 기울어가는 늦가을 드디어 채소 씨앗을 골고루 뿌렸답니다. 11월 초순이 되자 무 배추 낯익은 쌍떡잎부터 올라오기 시작해 시금치 대파 싹 파랗게 돋아나더라구유. 처음엔 그저 흙을 비집고 올라온 싹들이 기특하기만 했으나 과연 언제쯤 텃밭 꼴을 갖출까 싶은 게 그땐 당최 빈약하고 어설프기 그지없었슈.

비가 흠뻑 내린 11월 말 비로소 무 상추 쑥갓이 고개를 내밀고 제법 모양을 갖춘 배춧잎은 너울너울 빗속에서 춤을 추더라구유. 그러다 연말에 이르러 기온이 뚝 떨어졌는디. 비닐하우스도 아닌 노지에서 저 여린 생명들이 어찌 견딜까 싶었지유. 사방을 둘러봐도 황량스레 펼쳐진 평지뿐인데두 고도 2.700 피트에 이른다는 하이데저트 지역이거든유. 멀리 둘러선 장중한 산세의 평균 고도는 8~9천 피트에 육박하구유. 일교차가 큰 대관령에서 키운 고랭지 채소가 한국에서는 인기라는디 우리 집 텃밭 채소들은 자동으로 고랭지 채소에 속하는 셈이쥬. 요즘 낮 기온은 70도를 상회하나 밤엔 30도 선으로 급강하 하는디유. 사막 기후대의 특징이지유. 한낮엔 반소매를 입지만 해가 설핏해지면 히터를 가동해야 하구유. 그만큼 일교차가 크게 나므로 감기 걸리기 십상인 날씨인 거쥬.

아침에 둘러보면 잎새 가장자리 따라 성애가 하얗게 끼어있구유. 밤새 기온이 영하에 가깝게 내려갔으니 수분 많은 푸성귀라 냉해를 입을 만도 하쥬. 영하의 밤에는 꼼짝없이 이파리가 얼어 아침 녘에 보면 데친 듯 냉해가 들어 안쓰러울 정도였네유. 이땐 해줄 일이 아무것두 없어 그냥 지켜만 봐야하지유. 그래도 용케 얼어 죽지는 않구유. 파그르르 쳐져 있다가도 낮이 되면 깨어나는 걸 보면 연하디 연한 것 같아두 저마다 모진 생명력이 놀랍더라니께. 그렇게 해가 떠오르면 신통하게도 언 잎이 풀려 여전스러워지더라구유. 태양의 열기도 열기지만 땅이란 모성의 힘 덕으로 접하게 되는 경이로움이었지유. 아마도 지열에 의지한 뿌리가 끊임없이 생명의 온기를 전신으로 퍼 나르는 게 아닌가 싶데유. 누가 일러주지 않아두 생존의 방식이야 본능에 의해 저절로 뭇 생명체들마다 새겨져 있나 봐유.


"사막은 대리석처럼 매끄럽다. 낮 동안에는 그늘 하나 만들어 주지 않고, 밤이 되면 바람 앞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시킨다. 수증기가 없는 대기 아래에서 땅은 열을 빨리 발산한다. 벌써부터 아주 춥다. 일어나 걷는다. 하지만 금세 견딜 수 없이 몸이 덜덜 떨린다. 손이 하도 떨려서 더는 회중전등을 사용할 수가 없다. 이렇게 얼어 죽어야 한다니 마음이 아프다." 비행 중 리비아 사막에 추락한 뒤 빈사상태에서 기적적으로 구조된 조종사 얘기지유. 생텍쥐페리의 소설 <인간의 대지 >에 나오는 한 문장인데유. 전에는 이 책을 읽어두 대충 짐작뿐 전혀 실감을 못하던 밤의 사막 추위를 제대로 체감하며 지내네유. 그래도 품섶으로 파고드는 뉴저지 이월 추위에 비하면 이쯤은 감지덕지이지만유. 보셔유, 앙증스럽던 쌍떡잎 무 싹이 얼마 지나지 않아 연약하나 푸르른 이파리들을 연달아 뽑아 올리며 점차 튼실해지구유. 때 되면 열무는 연보라꽃, 배추는 샛노랑꽃 피어나지유. 거기다 신통스럽게도 무 뿌리는 알타리무임을 증명하듯 동그스럼해지더라구유. 삼월쯤이면 얼갈이배추김치에 열무김치 총각김치를 담글 수 있겠어유. 상상만으로도 대견스럽지 않겠나유.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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