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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Jul 19. 2024

영도다리 올라가요

1934년 개통된 영도다리는 육지와 영도를 이어주는 우리나라 최초 도개식 다리인데요.


훗날 민족의 애환 어린 만남의 장소였던 영도다리가 개통되자 섬까지도 전차가 들어가게 되었다네요.


한국전쟁 때 피난민들의 숱한 사연이 서린 부산 영도다리.

이북에서 피난 오며 "서로 손을 놓치더라도 우리 영도다리에서 다시 만나자" 란 언약을 한 상봉 장소였다지요.


그러니 동란의 와중, 영도다리 인근으로 피난민들 무진 모여들며 자갈치시장이 생기고 점차 국제시장이 형성되기에 이르고.


통인 당시, 믿을 게 없이 막막한 사람들은 앞날에 대한 불안감으로 점을 봤는데요.


하루하루 현재의 삶이 피폐하고 미래가 불투명할수록 신수를 알아보고자 많은 이들이 점집을 찾게 마련이었지요.


래서 영도다리 주변 어딜 가도 심지어 노상에 돗자리를 깔고도 점을 볼 수가 있었다네요.


당시 70여 개의 점집이 성업 중이었다지만 지금은 주변이 깨끗하게 정비돼 있지만요.


우리가 부산으로 이사 온 1984년까지도 근처 허름한 하꼬방에서 명맥을 유지하던 점집이 더러 박혀있더라고요.

공사기간 6년 만에 처음 영도다리가 모습을 드러낸 구십 년 전.


도개식 다리가 신기해 다리 상판이 들리는 영도다리 개통 행사를 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구름 떼 몰리듯 6만 명이나 모였다네요.


북녘에서 무작정 남으로 피난 오며 재회 약속 장소로 삼을만치 그만큼 전국적으로 유명한 다리였던 셈인데요.


영도 내 상수도관 연결공사에 더해  교통난 등으로 1966년 고정됐다가 47년 만에 다리 상판을 들어 올리는 기능을 복원해 재개통하게 됐대요.

지금은 매일 정오 12시부터 15분 동안 상판을 들어 올린답니다.  


먼저 차량이 통제되고 사이렌이 울리면 다리의 한쪽 상판이 서서히 올라가는데요.

한쪽 다리를 최대 75도까지 느릿느릿 올리는 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2분 남짓이랍니다.

바다와 산이 빼어나 관광특구로 떠오른 현재의 부산은 대한민국의 굴곡진 현대사를 품고 있는 역사의 현장이지요.

육이오 전쟁 당시 임시수도였으며 수많은 피난민들이 모여들었던 부산인데요.

엄청난 인구가 부산으로 유입되면서 피난민들은 판잣집을 지으러 산언덕으로 올라가 그렇게 형성된 산동네들.

산복 도로가 있는 수정동 초량동 영주동 봉래동 산만디에서 내려다보면 부산항 일원이 눈 아래 부챗살처럼 좌악 펼쳐지지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타지에서 맨손으로 삶을 꾸려가야 했던 피난민들.


그들은 억척같이 자갈치시장이나 국제시장을 생활 터전 삼아 애환 서린 고달픈 삶을 이어갔답니다.

미국땅에서 타관살이를 해봤기에 고향 떠나 사는 이들의 심정 십분 이해되고도 남음이 있기 때문일까요.

그래서인지 여전 영도다리는 '굳세어라, 금순아'로 환치되는 곳.

영도다리는 오늘도 실향민들 저릿한 추억의 현을 튕겨 눈빛 아득하게 만드는 촉매제로 거기 있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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