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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Jul 24. 2024

대숲에 바람도 청청

대숲의 기억은 하나다. 유년의 뜰에 내려서면 다가와 안기는 큰 외숙모 댁 뒤란의 밀밀한 대숲. 바람 잔 날은 마른 댓님 스치는 소리로 바스락댔고 바람 심한 날은 대통끼리 부딪치며 솨~솨 소리를 냈다. 해거름쯤 이르면 하도 어둑신해 근처에 얼씬대지 않았다. 그래도 낮엔 아늑한 놀이터였으며 바로 옆집인 작은할아버지 댁과 통하는 길도 대숲 안에 나있었다. 큰댁이라서 사랑채와 안채가 따로 있었던 큰 외숙네 집. 안마당엔 디딜방아가 떠억 버티고 있었으며 대문에 걸려있던 박쥐 장식의 커다란 자물통은 귀물이었다. 한국전 난리 때 세상 뜨신 젊은 외숙부는 대청마루 깊숙이 자리 잡은 상청의 하얀 궤연에서 조석으로 상식을 받았다.

어느 해 겨울, 작은할아버지네 잿간의 불티가 날아가 할아버지 집이 홀라당 불에 탔다. 불이 대나무 숲까지 옮겨 붙자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따발총 소리가 그러할까. 그 청청하던 대나무가 기름종이처럼 타오르며 타다닥거리는데 따발총에 뒤섞여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났다. 여간해선 집안 대소사에 관여하지 않고 사랑채에 은거하시던 외할아버지도 크게 놀라 허둥대셨다. 동네 사람 죄다 몰려나와 물통을 날라서 천만 다행히 큰댁 피해까지는 없었다. 봄 들어 새로 집을 짓기 전까지 그해 겨울은 한 지붕 밑에서 두 집살이를 하느라 북적거렸다. 지금은 대호방조제가 들어서 앞바다 개펄이 사라졌지만 그 옛날 외가가 있던 대호지는 농촌이자 어촌이라 살림 푼푼한 부촌이었다.



어릴 적 기억을 일깨우는 대숲에 갔다. 벌써부터 가고 잡던 울산 태화강 십 리 숲길이다. 휴일 아침 일찌감치 아들 전화를 받고 얼씨구나, 하고 따라나섰다. 한국에 돌아온 이유 중 하나가 아들에게도 효도할 기회를 주기 위함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했는데 명분이 된 건 맞다. 태화강변에 이르러 주차를 하고 우선 식당부터 찾았다. 늦은 아침이라 브런치 삼아 갈비탕 그리고 냉면과 떡갈비를 주문했다. 오랜 전통을 내세운 청면옥집은 손님들 버글거렸고 한참만에 나온 음식은 깔끔하고 맛깔스러웠다.

순천만 국가 정원에 이어 두 번째로 국가 정원으로 지정된 이곳. 청량한 기운 감도는 짙푸른 대나무숲이 시야를 맑게 씻어줬다. 어느 분 발상인지 대나무숲 조성 기획부터가 여타 안목과는 결이 다르다 보니 참신하게 느껴졌다. 공원 여기저기 눈길 닿는 곳마다 감탄사 새어 나왔다. 인위적으로 꾸민 티가 덜 나는 조경술에도 점수가 후해진다. 동해안에서 그것도 치장이랍시고 무분별하게 거대한 석 조각 조잡스레 늘어놓은 지자체들의 국비 탕진 사례를 수차 보아서다. 제 지갑 돈이라면 그리 터무니없는 과소비를 할까.

먼저 안내센터 전시 홍보관부터 들렀다. 3D 영상으로 태화강변에서 벌어지는 갈까마귀 떼의 군무 그 장관에 빠져들었다. 묵직한 특수 안경을 끼고 둘러보자니 어찔어찔 허공에 떠있는 듯하면서도 참말로 신통방통했다. 철없는 어린애처럼 신나 하니, 아들은 놀이공원에 자식 데리고 온 심정일지도. ㅎ 아무튼 여타 분야의 발전상도 괄목할만하지만 과학기술 특히 IT 산업을 적재적소마다 지혜롭게 접목시켰다. 유태인만큼 인정받는 한국인의 뛰어난 머리, 잘 사용되면 오죽 좋을까마는.

십리대숲 아직 안 와봤다면 무조건 강추다. 괜히 국가 정원 지정해 주었겠나, 하긴 울산시장인 절친에게 준 선물 같아 미심쩍은 면도 없잖지만. 어쨌든 태화강변 따라 빽빽하게 들어찬 대나무숲은 호들갑 떨며 자랑해도 될 만큼 아름찼다. 저절로 이루어진 듯 자연스러워 작위적인 티가 전혀 안 났다. 중간중간에 죽림욕장이 마련됐고 여름밤 별을 관찰하는 은하수 길도 나있다. 무엇보다 친환경적인 대숲에 고즈넉이 싸 안겨 흙길을 걷는 발길 더없이 편안했다. 대숲에 이는 바람소리에 귀 기울여 본 시간들이야말로 무량이 한유로웠다. 쌩한 날씨이지만 그마저 상큼해서 좋았다, 참 좋았다. 십리대숲길 조성안을 낸 기특한 공무원이 누군지 궁금하다는 말을 서너 번도 더 한 거 같다.


이곳 대나무는 고려조 시가에 이미 등장했듯 오래전부터 부분적으로 자생한 듯싶다. 그래도 십리대숲 만들 생각을 아무나 하겠나? 빠르고 강한 생장력과 번식력에 더해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대나무다. 서로 의지하고 부대끼며 더 단단한 뿌리와 성성한 기백 품게 돼 사철 푸르고 꼿꼿한 대나무. 원자폭탄이 투하된 히로시마에서도, 고엽제를 덮어쓴 월남 정글에서도 살아남은 유일한 수종이 대나무다. 이 나무에서는 음이온이 대량으로 나와 건강에도 아주 좋다니 여러 측면에서 남다른 착상이 아닌가. 우후죽순(雨後竹荀)이라는 말이 있듯이 대나무는 생육환경만 맞으면 쑥쑥 잘 자란다. 여름 새벽에 골프 치러 가서 삐죽이 솟은 죽순을 봤는데 낮에 게임 끝내고 나오다 보면 키가 움쑥 자라 있더라는 아들 말이 과장은 아니리라. 대나무의 생장속도는 왕대의 경우 하루 최고 60cm까지 자란다니까.

물결 푸르게 출렁대는 태화강은 철새 도래지이자 연어가 회귀하는 울산의 보물단지다. 일찍이 억새숲으로 각인된 태화강 지류답게 누르스름 색 바랜 억새 나붓대는 실개천 건너자 수생 정원과 초화원이 나온다. 그러나 실개천 흰 물새 외엔 지금은 철이 철인지라 황량스럽게 빈터다. 국화꽃 말라버린 화훼 정원 한 밭자리 가득 찬 작약 앙상한 줄기 끝이 어느새 발그스름해졌다. 양귀비 새싹도 파릇하게 돋아났다. 아들이 오월 양귀비꽃 필 때 몽이 콩이 강가지들도 데리고 다시 와보자고 한다. 랭커스터의 황금빛 파피를 대신해 줄 꽃양비귀 철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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