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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Jul 24. 2024

녹차향 스민 치악산 구룡사 다실

전망 좋은 치악산이 액자 가득 담긴 구룡사 경내에 있는 누각 다실이다.

정갈한 단청 입혀진 육각형 정자 안, 누각에 들어서면 깔끔스런 다탁이 몇 개 둘러앉아 있다.

고즈넉한 그 공간에 들면 차향 더불어 저 앞산 적요감까지 보태지며 자신도 모르게 슬며시 가닿는 선의 세계.

여태껏 본 중에서 다실 분위기 가장 그윽했던 곳은 통도사 축서암 다실이었다.

산간수가 대나무 대롱 타고 실내로 들어와 돌확에 고이면 그 물 떠서 무쇠 주전자에 찻물 끓이던, 벌써 수 십 년 전 기억이다.

여름 한복판에 찾은 구룡사 다실에서의 차 공양은 셀프, 커다란 보온병에 담긴 보이차를 찻주전자에 따라와 마시면 된다.

그러나 분위기 자체가 하도 차분해 헌다 의식 올리듯 법도와 격식대로 조신하게 찻잔 아래 손 받치고 천천히 나눠서 마셨다.

사실 그 다도란 격식에 얽매이는 자체가 내키잖아 평소 녹차도 조막만 한 찻잔 성에 안 찬다며 차 사발로 마셨던 사람인데도.

한여름 복국 훌훌 떠마시듯 무지 뜨거웠으나 시원하게 목줄기 타고 내려가는 푸른 향이 아주 괜찮아 거푸 석 잔이나 비웠다.

스페인을 유목민처럼 떠돌다 돌아온 내게 한눈만 팔지 말라는 무언의 채근인가.

이제는 계류 맑고 녹음방초 우거진 모국 산에도 들러보라고, 얼마를 더 기다려야 하느냐며 산은 말없이 눈으로 보채댔다.

후덥지근한 더위 계속되는 삼복 어느 날 행장 가벼이 꾸려 숲과 계곡 시원하다는 치악산으로 향했다.

남녀노소 누구라도 걸을만한 길, 가지런히 놓인 데크 따라 쭉쭉 뻗은 금강 소나무길 지나 구룡사 원통문에 다다랐다.

주련에 歷千劫而不古(역천겁이불고), 천겁의 시간이 흘렀어도 옛일이 아니라 쓰여있는 대로였다.

구룡소 가까이 터 잡은 구룡사는 신라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하니 천년을 한결같이 의연스레 정좌해 있는 절.

고찰 못지않게 대단한 풍모의 은행나무 그 또한 구룡사와 역사의 궤를 같이 한다니 천년 세월이 응축된 나무겠다.

바위 같은 무생물도 아닌 여리디 여린 생명체가 지구상에 뿌리내려 천년을 버틴다는 건 기적 같은 일이 아닌가.

말이 좋아 십장생이요 천년학이지 백 년조차 어림없는 학이며 갈라파고의 거북이 최장수 동물로 이백 년을 산다.

그에 반해 몇 해 전, 캘리포니아 화잇 마운틴으로 최고령 무드셀라 소나무를 보러 갔더니 나이가 물경 5천 년.

인근 거의 모두가 엇비슷한 연배로 향나무 고사목 닮은 나무들이 군락 이룬 기묘하고 괴기스러운 곳이었다.   

널리 알려진 대로 뱀에게 먹히려던 꿩을 나그네가 구해 주었고, 그 꿩이 머리 피나도록 종을 쳐 위기에 처한 나그네의

목숨을 구했다는 은혜 갚은 꿩 설화 간직한 치악(雉岳)이다.

岳 자가 들어간 산은 대체로 산세 거친 바위산인데 치악산은 숲도 여간 깊은 게 아니었다.

우거진 숲에는 반듯반듯한 소나무가 울창하며 특히 금강소나무가 군락을 이룬 이곳, 금강이란 말 그대로 단단함을 이른다.

황장목이란 소나무는 속이 눗누런데다 다부진 나무 결로 목재로써의 우수한 성능이 궁궐까지 소문났다는 금강송 서식지.

치악산 등산로 초입에 黃腸外禁標라 새겨진 바위가 있었다.

무슨 뜻인가 알아봤더니 이는 황장목 보호를 위하여 일대에서는 절대 일반인의 무단 벌목을 금지한다는 내용의 방(榜)이었다.

왼쪽으로 내처 따르는 물소리 청량하고 솔바람 서늘해 계곡에 발 담그지 않아도 이미 납량 효과는 충분히 거뒀다.

찌는 날씨에 굳이 폭포 구경한다고 정상까지 올라갈 거 없어 숲 그늘 바윗전에 앉아 쉬다가 문화재도 볼 겸 들어간 구룡사,

마침 점심공양시간이라 취나물에 고추장 비벼서 절 밥 포식하고 차까지도 마셨으니 입이 무진 호강을 한 하루였다.

그날따라 먹는 복이 터져 저녁엔 강원도 별식 도토리묵에 감자떡에 배춧잎 찌짐 안주로 시원스런 막걸리도 거나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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