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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Aug 03. 2024

시에스타가 없었다면

정오 무렵 서귀포 현재 기온 35도

<그림 John Singer Sargent : Siesta>


장맛비 그치자 연일 폭염특보가 발령되며 무더위가 한껏 기승부린다.

보다시피 체감온도가 35도를 훌쩍 넘겼으니 한마디로 통째 찜 쪄 먹을듯한 날씨의 연속이다,

지독한 폭염에 시달린다는 유럽 각국 그중에도 스페인은 어제 42도를 넘자 폭염특보가 내려졌다 한다.

몇년 전, 스페인 카미노길에서는 흐리거나 비 오는 날이 아니라면 항상 짙푸른 하늘에서 뱅뱅 도는 땡볕 아래를 걸어야 했다.

태생적으로 땀을 별로 흘리지 않는 체질이라도 태양 마주하고 몇 시간 걷고 나면 배낭 짊어진 잔등은 축축하게 젖곤 했다.


그나마 한국인은 땀내나 체취가 심한 편이 아니라 다행이나 건장한 외국인 대부분은  지나가면서도 쉰내를 풀풀 풍겼다.


그 당시, 바람 한점 없는 날은 숨이 턱 막힐 듯이 한층 더 더워서 그늘만 보이면 쉬었지만 그래도 무더위에 지쳐 기진맥진이 되곤 했다.

그럴 때 눈앞에 나타나는 어마무지한 교회건물, 순간 동병상련의 심정이 들며 안 그래도 더운 판에 열이 더 뻗쳤다.

중세의 열악한 환경에서 강제동원돼 일하던 농노나 포로들 일사병으로 얼마나 쓰러졌겠는가 싶어서다.

스페인이 보유한 문화유물 대부분이 가톨릭 관련 유산들이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국민 90% 이상이 가톨릭 신앙을 갖고 있는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이다.

따라서 가톨릭 문화재가 스페인 곳곳에 가득한 것은 당연한 일 일게다.

그같이 전국에 산재해 있는 무수한 관광자원 덕에 이제는 프랑스를 넘어 새롭게 부상하는 관광국가로 자리매김되어 가는 스페인 아닌가.  

조상들이 남긴 문화유산을 자원화하여 이탈리아처럼 한 세기는 넉히 우려먹을만할만치 수많은 역사유적을 지닌 나라다.    

숱하게 치솟은 고딕건물과 로마네스크 성전들을 몇 십 년 혹은 백 년 세월을 두고 쌓아 올리던 중세시대.

당시 왕이나 주교가 바보 아닌 이상 당연히 일꾼들이 한낮 뜨거운 폭염 속에서 일하다 픽픽 쓰러지도록 방치하지 않았을 터.

노동력을 그렇게 잃는 것보다는 햇볕 강한 낮 동안 쉬게 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그 시간대의 노동은 아무리 독려해 봐도 능률이 떨어져 어차피 효과적이지 못하니 차라리 낮잠 재우도록 하는 편이 더 낫다.

충분히 기력을 회복케 한 다음, 해가 유난히 긴 스페인이니 저녁 늦게까지 작업에 투입시키는 것이 여러모로 득.

만약 낮잠 자는 시간이 없었다면 아무 힘없는 나약한 민초들 기나긴 하루 끌질하다가 진짜 힘없이 마구 스러져갔을 것이다.  

시에스타는 지배계층이 누린 낮잠문화라기보다 야외활동해야 하는 하층민을 효율적으로 부리기 위한 방책였던 셈 아닐지.

물론 그 이전인 농경 시대, 뙤약볕에서 일하는 농부들이 한낮의 더위를 피하고자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제도이겠지만.  



말은 진작에 듣고 갔어도 막상 현지에 가서 부딪혀보면 참 어이없게 만드는 시에스터다.

대도시가 아니면 그 시간대 아무리 시장해도 문을 연 마트나 카페가 없어 생짜배기로 굶어야 한다.

급한 대로 허기 모면할 빵이나 물 한병도 살 수가 없으니 낭패, 정말이지 기가 차게 황당했다.

소도시일수록 철저히 지켜지는 시에스타라 오후 2시에서 5시까지는 거리가 휑하니 빈다.

멀쩡한 낮시간대인데 거리를 돌아다니는 주민은 찾아볼 수 없고 문을 연 가게도 찾아보기 어렵다.

과거 엄청난 해양대국이던 나라가 국가부도사태에 직면했던 까닭은 서너 시간씩 낮잠이나 자는 등 게을러빠져서 일거야, 라며 툴툴대기까지도 했다.

그처럼 스페인의 전통으로 굳은 시에스타 (la siesta)는 낮잠 자는 시간이나 잠시 살푼 자는 꿀맛 정도의 낮잠이 아니다.

본래 라틴어 Hora sexta, 여섯 번째 시간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는데 해가 뜨고 난 이후 여섯 시간이 지난 싯점인 정오
무렵부터 점심식사를 마치고 짧게 휴식을 갖는다는 의미였다.

실제로는 점심 먹고 서너 시간 실컷 놀다가 4시경 다시 출근해 오후 8시까지 근무, 한국에서 말하는 저녁이 있는 삶은 과연?

시에스타는 남유럽의 이탈리아, 그리스 등 지중해 연안 국가와 스페인어권인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에서 흔하다.

한증막처럼 찌는 한낮의 열기를 피하기 위한 실용적인 수단으로 시작된 la siesta는 나태한 휴식문화가 아니라 재충전을 위한 지혜로운 발상이기도 하다.

낮잠이 집중력과 일의 능률을 높여주는 효과가 있다는 연구결과도 나와있듯 적절히 잘만 이용하면 노동생산성을 향상시키고 건강을 지켜주는 효과도 있다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

한 예로 매일 낮잠을 즐긴 윈스턴 처칠경은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도 낮잠을 잤다는데, 70세의 나이에도 원기왕성하게
영국군을 총지휘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이 낮잠이었다고들 본다.

긍정적 측면도 있는 시에스타 제도는 사람 몸의 생체 변화를 고려한 과학적인 문화라 할 수 있으나 오늘날 스페인은 이 시에스타 문화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분초를 다투며 바쁘게 움직이는 현대 사회의 양상과는 반대되는 시에스타 제도로 인해 경제발전이 늦어진다는 판단에서다.

스페인 정부는 생산성을 떨어뜨린다는 이유로 구시대의 잔재라며 시에스타 금지조치를 한참 전에 내렸으나 국민 전체가 쉽게 수용하지 않아 여전히 시에스타는 존재한다.

잠깐의 낮잠으로 스트레스가 풀리고 혈압을 낮추며 심장병을 예방한다는 점은 진작에 과학적으로 증명됐다.

요즘 부쩍 심한 열대야 현상, 그로 인해 수면 리듬이 깨졌다면 낮잠으로 바로잡을 수도 있다고 한다.

평소 낮잠이란 걸 안 자는 사람이지만 알고 보니 보약이 따로 없잖은가, 당장 오늘 오후엔 꿀낮잠을 청해봐야겠다.

8월을 뜨겁게 달구는 폭염 탓에 낮잠타령이 길어졌으나, 그도 그럴 것이 오늘 기온만 해도  아침나절인 현재 30도에 낮최고 34도를 찍는 찜통 사우나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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