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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r 22. 2024

오웬스 벨리와 water wars

  물전쟁


Clean World, Clean Body, Clean Mind, Clean Soul & Clean Spirit!

몇 년 전 데스밸리에 갔다가 한밤에 190번 도로를 넘은 적이 있다. 오가는 차량조차 드문드문, 어쩌다 가끔씩 스쳐지날 뿐이었다. 운전하는 딸도 초행이다 보니 생판 겁 없이 오밤중에 그 험한 산길을 멋모르고 달렸다. 산을 여럿 넘어야 하는 줄 몰랐기 망정이지 알았다면 엄두도 못 낼 험로를 달리는 야간운행은 분명 모험에 속했다.

 

아무리 가도 가도 인가의 불빛이 안 보이니 여우에 홀린 듯도 싶었다. 슬그머니 겁도 나고 불안해지자 이 길이 맞는 거냐고 자꾸 되물어졌다. 딸은 짐짓 긴장을 삼키고는, 심심하면 노래나 불러봐~ 했다. 내 노래실력뿐 아니라 평소 노래를 잘 부르지 않는 줄 뻔히 아는 딸의 속내가 읽히기도 하는 데다, 나 역시 마음을 안정시키려 고른 노래가 성가였다. 낭중에 딸이 말하길 엄마가 성가를 부르니 진짜 더 겁나더란다. "주 하느님 지으신 모든 세계...." 딴에는 두려움을 희석시키려 평화로운 노래로 선곡했건만.

 

애초 계획은 휘트니 아랫동네서 하룻밤 푹 쉬고 아침 일찍 트래킹을 가질 작정이었다. 그러나 샌드듄에 혹해서 잘 찍지도 못하면서 이리저리 카메라를 돌려가며 사막을 담는다고 내가 너무 지체한 까닭에 일정에 차질이 생긴 것. 오웬즈 밸리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깜깜밤중 칠흑 같은 장막을 뚫고 휘리릭 통과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이튿날 아침, 간밤에 건너온 길을 보니 질펀하게 엎딘 하얀 광야는 사막보다 더 황량스럽기만 했다. 저게 뭐니? 묻자 딸이 말했다. 소금기를 드러낸 오웬즈 밸리인데 그곳 물줄기는 오래전부터 엘에이의 생명줄 노릇을 했대. 빨대 꽂아 쪽쪽 빨아먹듯 물을 다 빨려서 엄청 큰 호수며 강줄기가 죄다 바닥을 보여 급기야 소금분진이 섞인 허연 먼지만 날린대. 오늘 주제는 바로 이 오웬즈 밸리와 로스앤젤레스 간의 물전쟁 얘기다.



몇 차례 더 오웬즈 밸리를 지나게 됐다. 휘트니를 가거나 비숍을 오갈 적마다 만나는 곳이 여기인데 그냥 스쳐 지나는 객이건만 번번 마음이 무지근하면서도 목에 가시가 걸린 듯했다. 론파인, 인디펜던트, 빅파인을 거치는 동안 얼핏 얼핏 그 안타까운 정경이 보였기 때문이다. 담수라도 물기가 사라지고 난 호수바닥은 소금밭이 되어 마치, 속절없이 타버린 채 흰재만 남겨진 여인의 가슴팍 같았다. 인근에 마을의 흔적은 있으되 사람은 살지 않는 것 같았다. 한국에서도 수몰지구 이주민들 사연을 듣노라면 안쓰럽기 그지없었는데 여기도 사정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환경보전이 우선인가, 자연개발이 먼저인가는 쉬 풀지 못할 숙제 보따리다. 사회가 발전될수록 당연히 따르는 필요불가분의 법칙이겠지만 그러나 이 점 불편한 진실의 속살이기도 하다.

 

집에서 14번 하이웨이를 타고 가다 보면 나사(NASA) 연구소의 하나이자 비행연습지로 유명한 에드워드 공군기지를 먼발치로 지나게 된다. 다시 황막한 사막 한가운데 주유소 같은 시골마을인 모하비 시를 거쳐서 395번 하이웨이로 갈아타고 달리다 보면 올랜차에 들어선다. 그 오른쪽으로 시에라 네바다 빙하가 녹아 유입된 오웬스 레익(Owens Lake)이 펼쳐지며 이 지역부터가 이스턴 시에라 네바다(Eastern Sierra Nevada)가 시작되는 오웬스 밸리(Owens Valley)다.


밸리의 가장 큰 호수였던 오웬스 호수는 면적 280제곱킬로미터, 길이 19킬로미터, 너비 13킬로미터, 수심 7~15미터를 몇 세기동안 유지하고 있었다. 1913년 로스앤젤레스 수도전력국(LADWP: Los Angeles Department of Water and Power)이 오웬스 강의 흐름을 로스앤젤레스 수로로 전환시키기 전까지는. 즉 400여 km나 되는 대수로가 만들어지기 전까지의 상황이다. 여기서 LA시는 해마다 전체 물 공급량의 45%를 조달해 왔다.


원래 이곳은 17세기부터 인디언들이 관개방법을 익혀 물을 끌어다 농사를 지으며 평화로이 살던 Paiute 인디언 부족의 터였다. 거들떠도 안 보던 이 땅에 백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서부의 골드러시 때. 마구 밀려드는 이주민들에게 연방정부는 1인당 160 에이커의 땅을 무상지급하며 그들의 정착을 유도했다. 이후 1899년대 이곳은 4천 에이커의 농지가 경작되며 농장과 목장이 산재해 있는 풍요로운 녹색지대로 변모해 있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하였다. 안정된 그들의 마을에도 변혁의 조짐이 멀찌감치에서부터 태동되기 시작했다. 1889년 Frederick Eaton이 LA 시장이 되면서 수도전력국(LADWP:Los Angeles Department of Water and Power)을 신설하고 William Mulholland를 국장에 임명했다. 1900년 초 인구 10만이던 LA는 1905년 17만 명으로 늘어났으니 당장 물문제가 시급해졌던 까닭에서다. 그들은 로스앤젤레스에 절대적으로 부족한 수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오웬즈 지역을 활용하기로 결정했다. 일반대중이 해독할 수 없는 '지배구조의 암호'는 예나이제나 여전히 난해하다. 다수는 뭐가 뭔지도 모른 채 그냥 쓸려서 간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절대권력 혹은 절대강자의 횡포나 부도덕한 비리와 농간에 속수무책 당하긴 마찬가지다. 그뿐이랴, 세계역사를 통해봐도 시대를 좌지우지하며 이끈 소수에 의해 역사의 물줄기는 형성되어 왔다.

 

1902년~1905년에 걸쳐 이튼은 물 사용권부터 확보하기 위한 물밑작업을 진행했다. 캘리포니아 상원의원인 협조자 프랭크 플린트는 물 사용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정부에 제출했으나 미하원의 반대에 부딪쳤다. 이에 플린트는 직접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소수인 오웬즈 밸리 주민들이 이용하는 경우보다 대도시 수천만의 인구가 사용하는 것이 국민전체의 복리로 보아 더 중요'하다고 탄원한다. 결국 법안은 통과되었다. 이튼은 단계적으로 정계 로비를 해나가는 반면 현지민들에게는 속임수를 쓰면서 비밀리에 일을 추진시켜 나갔다. (영화 '차이나 타운'의 소재.)

 

먼저 오웬즈 밸리의 농지를 사들이기 시작,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그곳 토지의 90%가 LA 소유가 됐다. 그동안 수차례 수로 개설을 반대하는 현지농민들의 저항에 부딪혀 충돌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인명피해도 적잖았다. 그런 가운데도 굴함 없이 1903년부터 1913년에 걸쳐 파나마 운하에 필적할만한 대역사를 실현시켰다. 풍부한 수원지가 있는 전원 가까이에 인구과밀지역인 도시가 있다면 어디든 발생가능한 갈등의 표본이었다. 서로 상충되는 의제인 자연환경보전과 개발 사이의 마찰은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사안이다.


저지난해 로스앤젤레스 송수로 개통 100주년을 맞았다. 그 사이 오웬즈 밸리에는 생태계가 파괴되며 숱한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사막화 현상이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강바닥의 유해 알칼리가 일으키는 먼지폭풍으로 인해 주민들이 호흡기 질환으로 곤욕을 치르게 됐다. 호수와 늪지 등 야생조류들의 서식지가 파괴되며 새들은 더 이상 모여들지 않았다. 도요, 갈매기, 기러기, 오리, 물떼새 등 온갖 물새들의 낙원이었던 것은 한낱 전설이 되고 말았다. 수원이 마르자 뭇 식물들도 목숨을 부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나마 요즘 들어 오웬스 호수 바닥에서 일어나는 먼지를 제거하기 위한 방편으로 물을 일부 저류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100년 전 당시 기념식에서, 프로젝트의 총감독이었던 윌리엄 멀홀랜드는 “There it is. Take it”라고 감개무량하게 외쳤다. 오웬스 밸리 남서쪽에서부터 모하비 사막을 지나 로스앤젤레스까지 물을 실어오는 대공사는 그렇게 이루어졌지만 그늘은 이후 깊게 드리워졌다. 한편, 고갈되 가는 오웬 호수의 대타로 1941년 모노 레익의 수리권을 매입하여 그곳으로 유입되는 수량의 80%를 LA에서 끌어 쓰기 시작하였다. 이에 1972년 인요 카운티에서 환경영향평가서를 작성해 LA시를 고발, 오랜 공방 끝인 1989년에야 겨우 LA는 물 끌어 쓰기를 중단하라는 법원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이미 모노레익 역시 머잖아 지도상에서 사라질 운명이라고... 세상이 문명화되면 될수록 환경의 자연스러운 선순환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누군가가 자연은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할 권리를 갖는다고 하였다.  


아무튼 로스앤젤레스가 대도시로 확장될 수 있었던 것은 인구유입수보다 송수관이 끌고 온 물 덕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15년 샌퍼난도 밸리를 병합하며 면적이 두 배 이상으로 커진 로스앤젤레스는 물 공급이 충분해지면서 계속 확장정책을 펴 1930년에 이르러서는 인구가 네 배 가까이 늘어난 124만 명이 됐다. 송수관이 개통된 지 20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로스앤젤레스는 샌프란시스코를 제치고 캘리포니아 최대 도시가 된 것이다. 이튼 시장의 야심 찬 청사진에 의거한 한쪽의 축복은 다른 한쪽에겐  재앙이 분명했지만 말이다.


근자 들어 극심한 가뭄의 여파로 가뜩이나 부족한 수자원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고조되며 경각심도 깊어지고 있다. 천만다행이다. 그래서인지 현재 로스앤젤레스 시는 물 절약을 상당히 잘하고 있다는 평가다. 잔디밭과 수영장, 골프장이 도처에 흔한데도 시민 1인당 물 사용량에 있어 로스앤젤레스는 미국의 다른 대도시보다 훨씬 적다고 한다. 물전쟁의 확산을 막는 길이자 자연사랑, 환경보호의 첫걸음은 절수에서부터 시작된다.









태그#오웬스밸리#이스턴시에라#로스엔젤레스수도국#멀홀랜드 태그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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