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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r 23. 2024

만자나 수용소 소회(所懷)

강제수용소

비구름 잔뜩 낀 우중충한 하늘, 바람조차 심해 모래먼지가 부옇게 날렸다.

스산한 수용소를 둘러보기에 제반 여건이 딱 안성맞춤인 날씨였다.

그간 수차 이 앞을 지나다녔으나 우리 정서상 비호감인 일본이란 나라와 연관된 곳이라 별로 내키지 않던 방문지였다.

황막한 벌판에 우뚝 선 감시망루를 먼 빛으로 보더니 구경하고 가자는 동행의 청이 있어 이번엔 도리없이 들르게 되었다.  

만자나 수용소 (Manzanar National Historic Site).

만자나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에 거주하던 12만 명의 일본계 미국인들이 집단 수용된 강제수용소 열 곳 중 하나이다.

적막강산이 따로 없는 살풍경한 주변환경, 현대사의 그늘진 이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수용소 전경은 영화에서 본 유태인의 게토를 떠올리게 했다.

척박하고 휑한 공터에 철조망이 쳐있고 기념관이 들어서 있었다.

너른 터에 띄엄띄엄 수용시설 건물이 서있었으며 멀찍이 보이던 목제 감시탑은 다가갈수록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사방 거칠 것 없는 세찬 바람이 몰아치는 오웬스 밸리(Owens Valley)에 위치한 이 사적지에는 복원된 건물 몇 동과 기념관 내의 사진, 기록물, 영화 등을 통해 당시 생활상을 돌아보게 해 준다.

기념관에 전시된 사진 속 일본인들 표정은 심리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그다지 피폐해 보이진 않았다.

비록 수용소에 갇혔으나 학교가 정식으로 운영되었으며 놀랍게도 일본식 연못이 있는 정원까지 꾸민 호사취미도 목격됐다.

나름 그곳에서도 사교생활을 하며 댄스를 즐기는가 하면 미용실에서 잡지를 보면서 여유롭게 파머를 하기도 했다.

청소년들이 야구나 축구 등 운동경기를 하는 장면도 사진에 담겨있었다.

반면 실의에 빠져 쭈그리고 앉아 턱을 괴고 있는 남자, 하염없이 지평선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있는 노인 사진도 있었다.

집단 수용생활을 하던 초기인 1942년 말 발생한 내부 소요사태로 일본인 두 명이 사망하고 열 명이 부상당하는 사고도 있었다고.


나 침착한 일본인답게 그런대로 적응하며 줄곧 평온상태를 유지했던 모양이다.

하긴 일본인 속성이, 강한 상대에게는 한없이 약하고 약한 상대에게는 모질게 독한 종족인 까닭인지도.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 미군기지를 기습공격해 막대한 피해를 입히자 미국의회는 12월 10일 일본과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2차 세계대전 참전 계기를 맞게 된다. (진주만 공격사건은 미 학자 간에도 이견 분분하지만.)

일본의 다음 공격목표는 미서부 해안지방이 될 것으로 판단한 미국 측은 서부방위구역이 되는 해당 지역을 군사구역으로 선포하기에 이른다.

진주만 공격으로 인해서 일본인 모두에 대한 불신이 깊어져, 급기야는 1942년 루스벨트 대통령이 싸인한 행정명령에 따른 포고령이 5월 4일 발표되었다.  

서부지역 방위사령관 존 드윗 명의로 나붙은 공지문 내용은 재미 일본인에 대한 강제 소개령이 골자였다.

법적으로는 엄연히 미국인이나 윗대 핏줄로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계인 미국인(Japanese-Americans)들은 잠재적 적국인(Enemy Aliens)으로 간주돼 강제수용조치를 당했던 것.

이로써 당시 미국에 살고 있던 일본인들의 삶은 졸지에 급전직하로 추락하게 된다.

하와이와 동부를 제외한 미국에 거주하는 모든 일본계는 생업을 중지하고 5월 9일 정오까지 정부에서 지정한 장소로 집합하되 소지할 수 있는 짐은 트렁크 두 개만 허용됐다.

그들은 하루아침에 자유로운 활동을 박탈당한 채 황량한 만자나 등지의 수용소로 강제 이송되고 만다.  

각 가족마다 번호를 부여받은 다음 군인들 감시를 받으며 차량이나 기차에 올라타 임시 집합소로 모아놓았다.


거기서 다시 사막이며 황무지 등에 급조된 열 곳의 이주센터(War Relocation Center) 또는 격리수용소(Isoation Center)로 실려 갔다.  

억울하고 기 막히도록 어처구니없는 수용소 생활은 1945년 11월까지 지속되었다.

일본인들이 만자나에서 거주한 기간은 대략 3년 반 정도였으며 2차 대전이 끝난 후 미국 정부는 그들을 내보내주면서 직접 일자리까지 알선해 주었다.

1972년 미국 시민자유법이 제정되자 레이건 대통령은 수용소 생활을 한 일본인들에게 사과한다는 특별성명을 발표하며 배상금으로 1인당 2만 불을 지급했다.

수용인원 12만 명 중 사망자 4만 명을 제외한 8만 명이 보상을 받았다.

물론 일본인들이 미국정부를 상대로 끈질긴 법정투쟁, 즉 손해배상청구소송을 해서 얻어낸 결과였다.

만자나에도 그곳에서 사망해 묻힌 일본인들의 묘지가 수용소 서쪽 끄트머리에 있고 위령탑도 서있다는데, 굳이 거기까지 찾아볼 마음은 들지 않았다.

초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일본을 북괴와 동일시할 정도로 둘 다 뿔 달린 시뻘건 악마로 알았던 나.

과거의 잘못을 시인하면서 고개 숙일 줄 아는 대국다운 면모의 미국이나 독일에 비하면 일본은 천상 섬나라 쫄장부 왜넘들.

일본인이 조선인에게 가한 치 떨리는 만행은 1965년 당시 한일협정을 체결하며 받은 얼마간 경제적 보상으로 마무리됐다.

이후 반인륜적인 정신대 문제가 제기되며 한일 간은 아직도 풀지 못한 과제를 껄끄러이 남겨두고 있는 상태다.

따지고 보면 우리로써는 못난 탓에 당한 과거사.


허나 일본인들은 윗대가 저지른 과오이긴 하지만 언제까지 뻗대며 용서 구하지 않으려는지 만자나 유적지에서조차 잠시 밉쌀스런 기분이 스쳤다.

ㅡIt was un-American, unconstitutional, un-Christian.ㅡ라고 입구에 씌어있는 고백 문구대로 대전 당시 일본인들에게 행한 짓이 부끄럽다는 미국 국가와 확연히 대비되는 제국주의시대 일본, 꽤 많은 세월이 흘렀어도 쉬 용서되지 않는 앙금들.



1972년에 캘리포니아주의 사적지로 정비되며 이후 만자나는 국가 사적으로 등재된다.

미국 전쟁사와 일본 이민사에서 결코 망각될 수 없는 뼈아픈 역사적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특별한 장소로 자리매김된 만자나 수용소.

만자나 수용소가 들어선 자리는 원래 아메리카 인디언인 파이우트(Paiute) 부족들이 정착하여 살던 곳이었다.  

1910년대에는 백인 개척민들이 사과 배 복숭아 등을 가꿔 번성한 과수원촌을 만들면서 스페니시로 '사과밭'이라는 뜻의 만자나(Manzanar)로 불리게 되었다 한다.  

사과꽃이 만발하고 사과향 그윽하던 만자나는 1900년대 초 인근 오웬스 계곡에 집수 파이프를 연결한 LA 수로가 개통되며 물이 말라 들기 시작, 주변이 오늘날 같은 허허벌판 황무지로 변해버렸다.

 2차 대전이 발발하자 그 황막한 대지에 걸맞은 수용소까지 들어섰으나, 언젠가 좋은 세월 맞아 다시금 그 땅에 사과꽃 필는지...


*위치 : 395번 도로 선상에 인접해 있으며 론파인과 인디펜던스 사이에 자리했다.

<2차 대전 당시 미국 여러 주에 분산돼 수용된 재미 일본인 숫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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