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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추의 말리부 파도

by 무량화

여름이 서서히 이울어가는 일요일 오후.

산타모니카를 지나고 게티빌라를 뒤로 한 채 1번 국도를 타고 노스 방향으로 달린다.

왼편엔 망망대해 짙푸른 태평양, 오른쪽 경사지 곳곳 바다를 향해 앉은 저택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캠퍼스 내 초록 잔디 언덕이 아름다운 페퍼다인 대학을 일별하고 내처 달린다.

대학 캠퍼스를 스치자마자 서서히 차를 돌려 도로 건너편 숲 사잇길로 들어가면 파라다이스 코브가 나온다.

자칫 이정표를 놓쳐 입구를 그냥 패스하기 쉽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조붓한 숲길을 휘돌아 내려가면 가슴 벅차게 바다를 품은 파라다이스 코브에 닿는다.

프라이빗 비치로 비교적 자그마하나, 하얀 목조 피어는 운치 있고 여러 채 방갈로도 아기자기하다.

일단 비치 카페를 찾아 클램 차우더와 생선볼 튀김으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느긋하게 식사 후 비치를 맨발로 걸으면, 발가락 사이로 간질거리는 모래 촉감이 좋다. 온기도 적당하다.

저만치 밀려와 부서지는 파도는 성정이 자못 호쾌하고도 격렬하다.

거침없는 그 자유분방함, 지치지도 않는 그 끊임없는 도발이야말로 불멸에의 도전이다.

출렁이는 푸르름 한껏 걷어 안고 달려와 모랫벌에 냅다 내동댕이치자 바다는 하얗게 으깨지고 만다.

마침내 산산이 부서져 포말로 흩어지는 파도.

우주만물 모두가 생긴 즉 종내는 스러지고 만다는 생멸의 법칙을 진작에 터득한 바다인가.

한 점 미련도 애착심도 두지 않는 텅 빈 공(空)을 수용해 무(無)의 경지에 도달한 파도는 고수 중 고수.

번다한 누항사에 얽히고 인연에 설켜 살면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경계겠다.

이번은 단지 밀려오는 파도가 보고 싶고 파도 소리가 듣고 싶어 찾아간 말리부 바다다.

말리부 해안을 따라가노라면 여섯 개나 되는 크고 작은 비치가 구슬처럼 꿰어져 있다.

주마 해변, 서프리더 해변, 말리부 주립 해변, 토팡가 주립 해변, 포인트 듐 주립 해변, 댄 블라커 해변들이다.

말리부 해안은 서퍼들의 놀이터라지만 카약, 세일링, 낚시, 스쿠버, 수영, 파도타기, 비치 산책하기 등

각자 자기 취향에 맞는 걸 골라 즐기면 된다.

도심 가까운 비치들은 인파로 붐벼 복작거리는 반면, 이쪽은 대체로 한산해 가족끼리 조용하게 지내기 알맞다.

조무래기들은 물가에서 물장구질 치거나 자갈밭에서 물수제비를 뜨며 논다.

멍 때린 상태로 생각 없이 앉아있는 내 곁에 갈매기는 한가로이 날개를 접고 있다.

말리부 여러 비치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곳은 포인트 듐 해변이다.

남쪽 해안선이 특히 유려하고 언덕 위 노오란 야생화 사이로 산책코스가 길게 나있는가 하면 성벽 같은 수직 절벽이 운치를 돋우며 새하야니 펼쳐져 있는 곳이다

게다가 모래가 유난히 고와 신발 벗어 들고 걷게 만드는 해변으로 물빛 역시 곱디곱다.

바다 빛은, 푸른 계열에도 이처럼 오묘하기 그지없는 색상들이 다양하게 모여있음을 보여준다.

아이스 블루, 스카이 블루, 코발트블루, 프루샨 블루, 울트라 블루, 트루키 블루 등등.

색채의 향연을 펼치는 바다에 정물로 뜬 요트는 꿈꾸듯 아스라이 멀다.

북쪽 언덕에서 해안가로 연결된 낡은 철 사다리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면 수족관을 들여다보듯 작은 어류와 말미잘 성게가 돌 틈에서 기다려준다.

투명히 얼비치는 바닷속에 두리두리 모여 어린애처럼 재롱 피우는 건 물개 아니면 물범이리라.

운 좋은 날은 자맥질하며 떼 지어 지나가는 돌고래도 만날 수 있다.



어느 시인의 시처럼

'나는 오늘도

너의 푸른 섬에 닿지 못하고

일단정지의 거리 이쯤에서

발목만 조금 적신 채

너와 작별한다.'

흠모하는 너, <바다 애인>이란 시의 일부다.

파라다이스 코브에서 오후 한때를 보내고 코브를 떠나 다시 남하, 말리부 피어 표지판 앞에 멈춰 피어로 올라간다.

뭍에서 바다 한가운데로 길게 난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자신이 마치 스티로폼 부표처럼 둥둥 뜬 느낌이 든다.

그래서 피어에 서면 중심을 잃고 약간 어찔하니 허뚱거려진다.

잠시 벤치에 앉아 균형점을 찾은 다음 피어 끝으로 나아간다.

피어 양켠 여기저기 낚시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산타 모니카 비치나 네돈도 비치에서는 주로 고등어가 낚이던데 말리부에선 씨배스 농어 광어 가오리도 딸려 나온다고.

피어 낚시는 낚시 라이선스가 없어도 되며 비교적 안전하고 자리가 편해 누구라도 강태공이 될 수 있다.

울 집 낚시도구는 하염없이 주인을 기다리며 잠만 자고 있는데, 머잖아 입질과 손맛의 기억을 되살리게 될 터이다.

부산 살면서 요셉은 먼 전라도 이 섬 저 섬으로 사철 안 가리고 주말마다 낚시를 다녔다.

낚시를 떠날 때면 커피 생각이 나도 사러 가는 시간조차 아까워 참고 운전을 하던 낚시광이다.

그는 밥 먹는 짬도 절약하려 김밥이나 빵으로 때우며 서둘러 낚시 던질 채비를 하곤 했다.

거의 배낚시를 즐겼기에 심해에서 건진 싱싱한 횟감으로 먼 길 달린 피로를 풀었다는 그.

캘리포니아 바다가 그를 부르고 있으니 돌아오면 맨 먼저 낚시도구부터 챙길 것이다.

한국에선 그렇게도 싫어하던 비린내건만 나도 앞으론 기꺼이 낚시 친구로 동행해 줄 용의가 있다.

바닷바람에 얼굴이 새카매지건 말건 흉부 시원하게 관통하는 해풍을 쐬러, 나도 그 바다로 향할 테다.

말리부 파도여, 기다려다오.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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