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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Oct 23. 2024

영화, 마이크로 코스모스의 참여자들

1996년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

시간적으로 영원하고 공간적으로 무한한 우주. 센티미터 같은 단위가 쓸모없는 우주는 얼마나 광대한가. 그 속의 먼지 알갱이만큼 작은 행성, 우주에 우리는 산다. 하지만 지구의 너비는 굉장하고 나이 또한 엄청나다. 우리가 한낮일 때 지구 반대편은 밤인 곳이 있는가 하면, 폭설과 한파에 떠는 유럽 저편 호주는 한여름이다. 그만큼 넓다. 나이 역시 보편의 수치 감각으로는 언뜻 감이 잡히지 않을 정도다. 이를테면 삼엽충이 살았던 캄브리아기는 5억 년 전이니 아득하기 그지없다.


투명한 위스키 빛 또는 부드러운 황금색인 앰버라는 보석이 있다. 먼 먼 옛적 신생대 때, 소나무 수지 성분이 땅속에 매몰된 채 굳어져 형성된 보석인 호박. 때론 호박 안에 4천만 년 전 곤충이 옛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채 자태를 드러내기도 한다. 개미 혹은 벌 따위의 작은 곤충은 지금과 모습이 거의 흡사하다. 무수한 시공이 압축된 호박 속의 곤충 상태가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진화를 거부한 채 예나 이제나 변함없는 형태를 유지하고 있음은 놀라운 일이다.



그보다 훨씬 뒤 지구상에 나타난 인간은 단기간에 얼마나 눈부신 진화와 발전을 거듭해 왔던가. 자기 인식이 가능한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 오만을 부리며 이 세상을 지배해 왔다. 허나 그것은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나온 지극히 편협한 시각이 아닐는지. 지구 안의 자연계에는 각기 그 나름의 세계를 확보하고 공생공존하며 지혜롭게 살아가는 수많은 생명체들이 있다. 우리가 생활의 편의를 위하여, 더 나아가서는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자 적극적으로 인간 본위의 유위문화(有爲文化)를 일궈 오는 동안. 우리보다 훨씬 앞서 지구에 정착한 곤충들은 한결같은 숨결을 간직한 채 무위자연(無爲自然) 그대로 살아오고 있었다. 바로 그 곤충들의 경이로운 세계를 접하게 해 준 영화 <마이크로 코스모스>. 그 영화는 센티미터의 차원보다 한층 미세한 생명체들의 아름답고 신비로운 삶의 양태를 극사실 영상으로 보여 주었다.



여름날의 낮과 밤 그리고 다음날 동틀 무렵까지의 어느 풀섶과 주변 늪지가 다큐 영화의 무대다. 구름에서 급강하한 카메라 앵글이 풀잎에 초점을 맞춘다. 풍선만큼 커 보이는 말간 이슬방울. 그 물을 핥고 있는 개미 개미 떼. 마구 난타하는 빗방울을 맞고 나동그라지는 점박이 무당벌레. 그 사이 날씨 개이면 민들레는 하얀 씨앗 둥글게 부풀리고,  벌은 꽃에 앉아 밀원을 모으고, 식충식물 끈끈이주걱은 함정에 빠진 먹잇감을 조여 가고, 개미는 낱알을 물어 나르고, 풀쐐기는 삭삭 나뭇잎을 갉아먹고, 거미는 덫에 걸린 잠자리를  꽁꽁 묶고, 모기는 알에서 부화를 하고... 여러 생명체들이 일상을 영위해가고 있는 그곳 역시 하나의 소우주였다. 워낙 크기가 작아 평상시 우리 눈에 잘 띄지 않았을 따름이지 분명 제각기 다른 제 몫의 역사를 일궈가고 있던 그들.



카메라의 이동에 따라 진기하고도 환상적인 장면들이 속속 이어진다. 제 몸보다 훨씬 큰 쇠똥을 힘겹게 밀고 가는 쇠똥구리의 집념과 노고에는 성원의 박수 힘껏 쳐주고 싶다. 영역 다툼인 듯 격렬하게 몸싸움을 벌이는 사슴벌레의 일대 격전도 잡힌다. 하얀 열기구가 뜬 것 같은 민들레 씨앗이 스치는가 하면 양귀비꽃 피어나는 소리가 들린다. 안테나 닮은 나비의 더듬이, 우화(羽化) 하는 순간의 잠자리 몸짓도 신통스럽다. 서커스 하듯 덫을 치고 있는 거미의 날렵함이 돋보이고, 달팽이 한 쌍의 포옹신은 깊고도 완벽한 밀착이 인상적이다.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다. 한 시간 남짓의 자연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았다. 프랑스 두 감독이 20년 동안 경이로운 자연의 질서를 지켜보며 생명의 신비를 카메라에 담아냈다. 감탄사를 발하며 빠져든 화면을 그악스레 두드려대는 비. 구름장 빠르게 치달리며 뇌성 으르렁거린다. 빗줄기 거칠게 떨어지자 지표면의 흙은 달의 분화구처럼 둥글게 파인다. 호수에 방울져 내리는 빗물로 수면은 출렁출렁 크게 요동질 친다. 물맴이가 그 파문에 떠밀려 저만치 나뒹군다. 피겨스케이팅을 하던 소금쟁이는 수초 그늘로 얼른 숨어 버린다. 곤충들 역시 하루하루 생의 장애물이며 운명의 질곡들과 직면해야 하는 생명체였다. 마이크로 코스모스는 나지막하게 그러면서도 단호하게 말해준다. 인간은 지구의 주인이 아니라 그저 단지 자연계의 참관자이자 참여자일 따름이라고.



그렇다. 무엇으로 우열을 매기고 어떻게 주종 관계를 따질 수 있겠는가. 생명의 가치에 있어 개미의 존재는 작기에 보잘것없는 것이고 인간의 존재는 월등 크기에 대단한 것일까. 하루살이의 하루는 하찮고 우리네 백 년은 위대한 것일까. 시간과 공간의 분별, 상대적인 분별 이전의 관점에서 살피면 크고 작음이나 길고 짧음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불가에서는 사람을 포함한 일체의 생명을 통틀어 중생이라 르고, 생명 있는 모든 것에 불성이 있다고 가르친다. 끝없는 윤회를 통해 언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게 될지 모르는 게 중생사다. 누생의 어느 한때 지중한 부모, 형제, 자식의 인연이었을지 알 수 없는 생명체임에 그 무엇과도 허투루 대할 수가 없는 일. 하물며 살생이랴.

 

해서, 모든 중생을 자비로 품어 안으려 한 수행승들은 짚신을 성글게 삼아 신고 다녔다. 주장자를 짚고 다님은 길 위의 무고한 생명을 다치지 않게 하려는 배려에서였다. 절에서는 야채 삶은 물을 그대로 수채에 붓지 않는다. 끓는 물에 무참히 죽어갈 미물들이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허나 요새는 살생유택을 앞세우면서 예사로 해충방제약을 뿌린다. 심지어 항공 살포도 마다하지 않는다.  베트남 정글을 말린 에이전트 오렌지 같은 잡초 제거제 디립다 뿌려댄 논두렁이며 밭 가생이 풀은 뭐든 다 누렇게 죽어간다. 모질고 강퍅해진 세태 따라 생명에 대한 외경심마저 줄어드는 것 같아 안타깝다.



 우주정복을 꿈꾸는 인간. 실제 인간의 능력은 무한대이고 그 힘은 때때로 가공스러운 위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따라서 맘만 먹으면 곤충들의 생활 터전인 숲 하나쯤 깡그리 없앨 수도 있다. 일찍이 고엽제로 정글을 초토화시킨 전력에다 무차별 개발로 지구 곳곳의 신음소리를 듣고 사는 우리다. 마구잡이 폐수 방류로 시커멓게 죽어가는 강이 어디 낙동강 뿐이던가. 그런 만용과 무지로 몰아붙인다면 곤충들의 평화로운 삶의 터 같은 건 삽시에 사라지고 만다. 시멘트 포장으로 덮어 버리거나 불도저로 밀어 버릴 수도 있다. 약간의 살충제만 뿌려도 끝장이다. 무수한 주검들을 외면한 채 우리는 물질문명이 가져다준 풍요에 만족해하며 의기양양이다. 하지만 생물이 떠난 곳은 인간 역시 뿌리내릴 수 없는 법.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거나 배반해 자연이 분노하는 날 엄청난 재앙이 닥침을 짐짓 외면하고들 산다.

우주에서 내려다본 인간, 그 또한 나약하고 미미하기 그지없는 존재다. 아무리 잘난 척 설쳐봐야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인간의 한계 아닌가. 르네상스를 거쳐 눈부신 물질문명을 자랑하던 서유럽이다. 그러나 세계 인구의 3분의 1 정도를 감염시킨 대유행병이 발생했다. 20세기 최악의 재앙으로 기록된 제1차 세계대전의 승패마저 가른 감염병이었다. 서구를 휩쓴 서반아 감기(스페인독감)가 기미년 삼일운동을 촉발시킨 원인 중 하나였을 정도라 하. 고베시의 한신 고가도로는 지진에 대비해 설계된 것이라고 큰소리쳤지만 지층 한 번 어긋지며 허망이 내려앉았다. 거대한 해일을 동반한 허리케인에 미국의 한마을이 속절없이 쓸려 가기도 했다. 폼페이 영화는 순식간에 화산재 아래 묻히고 말지 않던가.

이 영화는 새로운 세계로의 탐험이며 나아가 자연의 섭리를 무시하고 사는 인간의 오만함에 대한 경종이 아닐지.


상품명이 ‘메뚜기 표’인 쌀이 있다. 농약을 치지 않은 벼, 그래서 메뚜기가 사는 논에서 수확한 믿을 만한 무공해 쌀이라는 뜻이리라. 오래전, 추수를 앞둔 가을날. 내 키의 반 가까운 청주 댓 병(큰 술병)을 들고 채운벌에 메뚜기 잡으러 가곤 한 유년시절이 있었다. 메뚜기는 닭의 좋은 모잇감이었기 때문이다. 벼가 누렇게 고개 숙인 논에서는 움직이는 대로 메뚜기가 마구 튀어 올랐다. 무진장 많던 메뚜기 떼. 이젠 메뚜기는커녕 논고랑의 우렁이도, 심지어 징그러운 거머리조차 만나기 어렵다. 독한 화학비료에 녹아나고 농약 과다 사용으로 도저히 버텨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리라. 그렇게 자연 속의 공동운명체, 또 하나의 참여자들은 자꾸만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




마이크로 코스모스가 보여준 동화 같은 세계는 점차 만나기 어려운 풍경이 되어 간다. 그나마 우리 세대는 가난했을망정 잘 살았다 여겨진다. 이젠 어느 공간에서 그 순수와 다시 해후하랴. 때묻지 않은 자연과 하나 되어 뛰놀며 퐁퐁 솟는 샘물에 목 축이던 때. 메뚜기 쫓던 그때가 새삼 그립다.                                                                                                                  -1996. 12-ㅣ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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