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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판 Aug 20. 2021

『거짓의 조금』 / 누군가를, 산다는 것을 이해하는 일

유진목의 글을 읽으면 그가 된 것 같은 느낌이다. 마치 헤비메탈을 듣고 불량아가 되었다고 착각하는 청소년처럼. 그가 나열하는 산문의 단어는 대개 어두운 단어다. 그렇지만 그것만큼 자신의 삶을 직시하는 단어들도 없다. 그렇기에 작가는 편안하게 책을 읽었을, 그저 구절을 옮기며 "오래 울었다"라고 말하는 독자들을 벌레라고 하며 경멸한다. 차라리 "이 책 슬퍼 뒤짐."이라고 쓰는 게 낫다고 하지만, 왓챠피디아 평에는 이 문장마저 힙스터들의 암호문마냥 도배되어 있다.


도시적인 우울 속에서, 인생과 타인을 생각하고, 때때로 망가짐을 전시한다. 니진스키의 일기가 생각난다. 여성으로서 서사를 개진하는 이전의 느낌은 옅다. 단지 그는 몸과 섹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제는 성욕이 없다고 고백한다. 그럼에도 그를 품어주는 시간은 여전히 밤이다. 그에게는 가난과 헤어짐이 있었지만 술과 연애가 있다. 부모님의 이혼 앞에서 울기도 했지만 사랑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때로는 폭력과 모욕, 살의가 느껴짐에도, 일기로 귀착된다. 일기는 삶을 견딜 수 없는 증거이므로 일기를 조금만 쓰고 싶다 한다. 쓸쓸함이 느껴진다.


이런 글을 동경하고 사랑하나 이런 글을 쓸 수 없었다. 감각의 렌즈가 다르다. 감각하는 법이 다르고, 경험이 다르기에 그것을 흉내낼 수 없는 것이다.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유복했던 가정에서 보낸 것이 어떤 면에서 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원인이라는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그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십 년의 고독이 있었기 때문일까. 나는 선택할 권한도 없이 홀로 있어야 하는 시간이 많았고, 그것은 분명 마음을 패이게 했다. 그것으로 인해 삶과 죽음에 대한 의식을 늘렸다. 고독한 시절을 견디는 일은 삶을 견뎌야 하는 일과 같았다.


산다는 것은 어느 것을 감각하는 일일까. 때로는 누군가를 감각하려 했지만 그처럼 감각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완전한 이해보다는 적게 이해해야 한다. 그리하여 그를 용서하지는 않아도 마음 속으로 떠나보낸다. 우리는 모두 죽으니까. 정해진 순서 없이 떠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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