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을 나가는 날 외에는 집에 있었다. 모임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외로움을 느꼈다. 사람들은 내 신분을 가리지 않고 환대했지만, 나는 사람들과 섞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같이 어울리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직업이 있어야 했다. 번듯한 직업이 아니더라도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고, 그것으로 돈벌이를 한다는 것을 증명해야 할 것 같았다. 모임에 나갈수록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압박이 커졌다. 그런 압박감을 느끼면 사람들과 거리를 두었다.
작가라는 꿈에 자부심이 있었기에 내가 이상한 상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작가를 꿈꾸는 것으로 인해 고립되어 있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 작가라고 해서 모두가 고립을 하는 것은 아니다. 몇몇 사람들은 작품 활동을 하면서도 다른 일을 하면서 돈벌이를 한다. 먹고 살 만한 여유가 있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 사회와 연결되어 있다. 그렇지만 내 경우에는 사회생활을 멀리하면서까지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러다 보니 궁핍했고, 행동반경이 줄어들었다. 돈이 부족할 때는 예민해지기도 했다. 그럴 때는 모든 것에 우선순위가 생긴다. 당장 돈을 쓰지 못하니 사람을 만나는 일을 줄인다. 그렇다고 아예 안 만날 수 없으니 최소한의 사람만 만난다. 그러면 누구를 우선해야 할지 판단한다. 내게는 거리도 가깝고, 나에 대해서 깊이 간섭하지 않는 독서모임이 편했다. 그것으로 깊은 친밀감을 느낄 수 없다 하더라도 말이다.
온라인에는 삼십 대가 넘어도 꿈을 포기하지 않고 예술가 지망생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비판하는 글이 떠돈다. 그런 사람에게 예술가병에 걸렸다고 표현한다. 어쩌면 알량한 재능으로 터무니없는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어떻게 삶을 살아가야 할지 모를 때 버틸 수 있게 해준 것이 글이었다. 글을 너무 사랑했기에 다른 삶을 생각하지 못했다.
장강명의 『당선, 합격, 계급』에서는 작가지망생과 수험생을 비교한다. 둘 다 특정 성취를 목표로 하고, 원하는 목표에 오르지 못하면 오를 때까지 오랜 시간을 흘려보낸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장기 수험생의 경우 점수 차이에 의해서 당락이 결정지어지고, 원하는 점수에 못 미치면 좌절한다. 반면에 작가지망생은 점수가 보이지 않는 문제지에 답을 쓴다. 불합격을 통보받아도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스스로의 재능을 의심하거나, 상대방을 의심한다. 그로 인해 가짜 정보를 공유하기도 한다.
내 선택도 시대에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싶다. 공무원 열풍이 불었을 때 개인의 의지로 공무원을 택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중에는 그저 번듯한 직장을 목표로 삼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아예 하고 싶은 게 없거나, 세상이 꿈을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길을 택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내 경우에는 작가로 성공할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있었다.
90년대생 전반에게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정서가 있었다. 그것이 청춘이라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90년대생이 사회에 점점 자리 잡아가는 현재도 누구나 뭐든 할 수 있다는 정서가 강하다. 그것이 현실을 바라보지 못한 진단인지, 아니면 정말 다양한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갈망이 폭발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기존에는 정해진 길로만 가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다면, 그래도 지금은 다양한 길이 열리고 있다. 물론 현실적으로 봐도 새로 열리는 길은 쉽지 않을 것이고, 그 사이에서 탈락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 경우에도 탈락자에 가까웠고, 고립 당시에는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혼자 있을수록 사고는 점점 좁아졌다.
고립에서 벗어난 후 작가의 정체성을 키우고 있다. 예전에는 고집이 강했다. 내가 만족하지 않으면 절대 타협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런 강박을 내려놓고 활동하고 있다. 그러고 나서 세상을 보니 다른 사람들도 항상 힘을 주고 살지는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고립 중인 사람 중에는 완벽주의 성향이 강한 경우가 많다. 그런 성향을 내려놓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