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슷 Feb 26. 2024

사랑을 사랑하다

알랭바디우, <사랑예찬> 

나는 사랑을 사랑한다. 누군가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로 인해 변화된 자신의 일부를 안고 사는 이야기들을 좋아한다. 그 이야기의 끝이 그들이 자신만의 길을 가기 위해 선택한 이별이라면 내 취향 완성이다. 상대방의 선택에 '함께'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그 선택까지 수용할 수 있는 이야기면 더더욱 좋다. 이런 내 취향을 아는 지인이 추천해 줘서 읽게 된 책 알랭바디우의 <사랑예찬>.



이 책에서 사랑은 우연의 만남으로 시작되어 둘이 무대 위에 올려지며, 사랑을 선언한 순간부터 무대 위에서 경험하고 모험하며 고통과 시련도 기꺼이 끌어안으며 탈중심적 인새로운 세계를 구축해 둘의 지속을 사유하는 것이다. '지속'이라는 말이 나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지만, 취향과는 별개로 다른 내용들에는 동의하면서 읽었다. 


사랑은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에 특히 공감됐다. 현대 사회는 위험을 피하려는 경향이 짙은 사회다. 하지만 사랑은 그럴 수 없다. 타인과 함께 한다는 것은 상대가 누가 되었든 위험한 모험일 수밖에 없다.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타인을 마음으로 끌어안아 내 세계의 일부를 부시기도 하고, 확장시키기도 하는 과정이 위험을 동반하는 건 당연하다. 그래서 사랑을 지속하려는 노력이 어렵고 또 귀한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듯 내가 제삼자가 되어 이야기 속 사람들이 사랑할 때는 이별하는 걸 좋아한다. 사랑을 지속하려는 노력은 사실 사랑하는 당사자들만의 맥락이 담겨있고 또 뉘앙스도 제일 잘 알기 때문에 둘만의 이야기다. 그래서 제삼자의 입장에서 특히 영화, 소설, 뮤지컬을 통해 그들의 사랑을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지켜보는 것만이 나의 역할이 된다. 개입할 이유도 없고, 나의 상황이 투영된 감정적인 동요가 일어나긴 해도 나는 그냥 철저한 외부인일 뿐이다. 


반대로 둘이 각자의 인생을 살기 위해 이별을 선택하고 이야기가 끝나는 경우에는 나의 역할이 생긴다. 바로 그 사랑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그들이 사랑하는 걸 봤고, 어쩔 수 없이 헤어짐을 선택하는 것도 봤고, 또 어떤 경우에는 헤어지고서도 서로를 그리워하는 모습까지도 본 증인으로서 감정적으로 같이 앓을 수 있게 된다. 그렇게 감정적으로 엮고 허구의 이야기에 사랑 앓이 하는 것을 누릴 수 있다. 이 점이 내가 이별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다. 책을 읽으면서 실제로는 어떤 사랑을 나눠야겠다고 방향 설정을 했다면, 덕질적으로는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들의 공통점을 찾았달까? 


흥미롭게 읽긴 했지만 아쉬웠던 점은 남녀 간의 연애에서 결혼으로 이어지는 사랑만을 전제했다는 것이다. 나는 '사랑'은 연애-결혼의 과정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이라면, 생물이라면 누구에게나 혹은 더 확장된 대상들에게 가질 수 있는 감정이다. 언어로 정의할 수 없는 관계일지라도 함께 무대 위에 올라가 발을 맞춰 왈츠를 추려고 노력한다면 그것이 사랑 아닐까? 



마지막은 내가 이 책에서 좋아하는 구절이다. 

그 노력들이 지구 곳곳에서 다양한 관계 속에서 계속되길 바란다. 

작가의 이전글 길 잃다의 다른 말, 탐험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