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슷 Jul 05. 2023

D에게

어느덧 내 인생 2/3의 증인으로 살고 있는 너에게

벌써 7월 초다.

나는 이맘때쯤 평소에는 있는지도 모르고 살던 페이스북에 들어가곤 해. 몇 해전 우리 여행했을 때 나 페이스북에 매일 일기를 남겼었잖아. 어플에 들어가 '과거의 오늘'을 누르면 우리의 여행기가 뜨거든. 그걸 읽는 것이 자정이 넘어서 자는 나에게는 하루 시작의 소소한 기쁨이야.


그 여행, 우리 정말 갑작스럽게 가게 되었지. 정확한 인과관계는 기억이 희미하지만, 너의 퇴사시기 그리고 내가 여행을 시작하려던 시기가 우연히 맞물렸잖아. 그래서 가게 된 여행. 그 시작에는 너에 대한 고마움이 있어.


유난히 '똥줄'을 많이 타던 나. 처음 내 힘으로 친구와 가는 해외여행. 가기로 결정하고 비행기표를 사려는데 시동걸린 똥줄. 시간이 지나면 가격이 오를 것 같은데, 지금 당장 카톡으로 이야기하다가는 결정 못하겠다고 하니 그날 밤에 우리 집으로 네가 오겠다고 했잖아. 우리 둘 다 그때 늦게 끝나던 때였는데. 처음이라고 우당탕탕 우여곡절을 겪으며 표를 사고 너를 정류장까지 데려다주면서 고마움을 전하니까 너는 그랬지.


"됐어 너 똥줄 타는 거 덜어서 다행이야"라고.


나는 나의 정반대에서 다가오는 배려가 너무 좋다.

나였으면 생색도 내고, 구박도 한 두어 마디 할 텐데. 꽤 오랜기간 나의 모습을 다 지켜봐 온 너는 그냥 말없이 우리 집에 오겠다고 말하더라고. 그 한 마디가 배려의 마무리였어.

나는 늘 담백하고 묵직하게 나를 안아주는 너의 배려가 좋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여행. 시간이 흐를수록 그렇게 무모할 수가 없었다. 몰랐기에 무모했어. 무모했기에 겪었던 모든 시간들이 너무 소중해. 언젠가 네가 그때 여행 많이 다닐걸 그랬다고. 지금은 그때만큼의 감흥이 오지 않는다고 했지. 난 늘 그 감흥을 유지하기 위해 내 감각들을 갈고 닦으려고 노력하려는 사람이라 크게 공감 가진 않았어.


그런데 오늘은 문득 그것이 처음이었기에 몰랐고 무모했어서 더 소중했던 여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몇 자 적어.


고작 24시간 경유하면서 시내에서 택시로 30분이나 먼 곳에 숙소를 잡고, 환전도 제대로 안 해가서 택시비를 못 낼뻔하기도 하고, 로밍을 아예 안 해갔어서 도심지에서 숙소로 가는 길을 검색해보지도 못하고, 쓸데없이 숙소를 여러 번 옮기기도 하고 말이야.


지금은 그때처럼 덜 고생할 수는 있어도 무모했기에 소중한 추억들을 만들긴 힘들겠지? 그렇다고 우리의 여행이 망한 것도 아니었어. 그거대로 웃기고 좋았지. 무섭기도 했지만 낯선 곳에서 익숙함으로 존재했던 너덕에 안정감을 느끼면서도 내 우주의 일부분이 박살 나면서 확장되었던 좋은 날들이었어. 여행 중의 그 어떤 순간도 다 여행이구나, 그것이 어떤 일이든 일어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구나, 그리고 미리 똥줄탈 필요가 없구나. 짧다면 짧은 8일, 나 많이 배웠다.


내 안의 무언가가 늘 합의가 되지 않아서 그럴까? 매일 이상과 현실이 싸우고 그 사이의 새우인 나는 등이 터져. 미래를 예측할 수 없어서 불안하니 예민해지고 그래서 매일 싸움이 일어나. 맞아. 나 또 똥줄 타는 중이야. 그러다 문득 어제 보고 잤던 우리의 여행이 떠올랐어.


맞아.

어떤 순간도 다 여행이지.

그것이 어떤 일이든 일어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구나

미리 똥줄탈 필요가 없구나


그렇네.

지금 이 순간도 난 인생을 살고 있는 거야. 결정적인 순간만 인생이라고 부르지 않잖아. 내가 불안한 건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인데, 원래 인생은 어떤 일이든 일어나도 이상한 일이 아닌 거였어. 그냥 그게 인생이었어. 그러니까 미리 똥줄 탈 필요가 없구나.


우리는 매일, 아니 매시간 매초 출발선 앞에 서있어. 어쩌면 출반선에 서있는 것 자체가 여행인거겠지?

그러니까 우리의 첫 여행 때처럼 나는 모르기 때문에 무모할 수밖에 없어.

무모함은 나에게 소중한 여행을 남겨줬든, 소중한 시간들을 또 만들어주겠지?


후-


이러다가도 또 무서워져서 똥줄 타게 되면 너한테 징징거릴지도 몰라. 그럼 넌 그때처럼 날 안심시켜 주겠지? 오늘의 불안함이 내 몸을 슥- 빠져나간다.


언제나 낯선 인생 여행 속의 익숙함으로 또 내 인생의 증인으로 오랜 기간 옆에 있어주는 내 친구 D, 고마워.

작가의 이전글 백수를 누리기 위한 노-오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