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알미 Aug 13. 2021

'줌 아웃'하면 보이는 것들

<참 소중한 당신> 10월 원고

대학에 입학하고 첫여름방학이었다.


고교 단짝 친구와 나는 아르바이트를 구하려고 매일 만났다. 이력서를 내고 부지런히 면접을 보러 다녔다. 옷가게, 커피숍, KFC, 베스킨라빈스...  어디도 우리를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우리가 일을 못하게 생긴 건가?' 우리에게 무슨 큰 하자(?)가 있어 보이진 않았는데 그렇게 친구와 나는 똑같이 아르바이트를 구하지 못했다. 착잡한 마음으로 논의 끝에 우린. 방학 동안 알바 구하기는 접고 도서관에 다니기로 했다.


대학생이 된 첫 방학이 이렇게 싱겁게 시작될 줄은 몰랐다. 친구는 일찍 공무원이 되겠다며 준비를 시작했고, 특별히 무언가 되고 싶었던 게 없었던 나는 친구가 공부할 동안, 서가 하나를 정해 맘에 드는 책을 차례로 읽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프랑스 소설을, 어떤 날은 앙코르 와트와 카오산 로드에 관한 여행서를 읽고 금방이라도 떠날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두꺼운 책이 부담스러운 날에는 잡지 코너에 가서 내가 좋아하는 평론 글을 복사해 스크랩하고, 나만의 단어 사전도 만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과제도 아니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무언가 날마다 꾸준히 읽고 정리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이 사실을 엄마가 알았다면 "고3 때 공부를 그렇게 했으면 쯧쯧." 혀를 내두르셨을 거다. 아마도 아르바이트 면접에서 선택되지 못한 분한(?) 마음이었을 거다. 보란 듯이 알차게 방학을 보내겠다는 오기가 생겼으니까. 그렇게 나의 방학은 심심하고도 천천히 지나갔다.


개강을 한 후 수업을 듣는데 교수님이 '아니 에르노' 책 읽어본 사람? 하고 물어보셨다. 조용한 가운데 은근한 우월감이 생겼다. 이번 여름에 나를 가장 뜨겁게 해 준 책이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이었다.

프랑스 소설에 흥미를 가지게 해 준 책이기도 하다. 이때부터 나에게 방학은 무엇인가를 해야만 하는 큰 과제이자 '새로운 도전'의 시기가 되었다.


다음 겨울방학에는 대학시절 통틀어 가장 생동감 넘쳤던 스키장 아르바이트를, 취업 고민 많았던 3학년 겨울에는 한 잡지사에서 주최한 인턴십에 지원해 일 년 동안 근무했다. 도서관에서 열심히 스크랩했던 잡지, <씨네 21>에 '충무로 새내기'란 기획 코너에 짧은 인터뷰도 했다.


여러 아르바이트에 거절당했던 그때를 줌-인! 해서 들여다보면 참 답답했다.

성인이 되었는데여전히 여고생처럼 단짝 친구와 교환일기를 쓰고, 책으로만 여행을 꿈꾸는 일상.

내가 생각했던 대학생의 모습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고 그때로부터 -아웃! 해보니 도서관에서 품었던 작은 마음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바라던 일을 바로 하지 못했지만 경험이 늘어나면서 나뭇가지가 뻗어나가듯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다.


성서를 읽으면서 가장 와닿았던 말이 '야훼 이레'이다. 지금은 시련이지만 훗날 나를 위한 단련.

' 그게 도움이 됐었어.' 하는 나를 위한 준비와 이끌어 주심. 도서관 구석자리에 있던 나의 여름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밑거름을 만들어 주었다.


앞으로 나는 어떤 일을 해야 할까 많이 걱정되는 요즘. 무엇이 펼쳐질지 모르는 - 생태에서 렌즈를  넓게, 마음을  멀리 보내본다. 줌-아웃했을 때  인생이  생각지 못할 일들로 가득 차리라 믿는다. ‘이번엔   위해 무얼 숨겨 놓으셨나? ‘하는 

은근한 기대와 함께.


그나저나 지원한 아르바이트에 모두 낙방한 트라우마는 어느  갑자기 해결됐다. 동네 산책 중에 발견한 빵집 구인 글을 보고 무작정 들어가,

"저 아르바이트하고 싶은데요." 했다.

빵집 주인아저씨는 이것저것 물어보시곤 말씀하셨다.


"내일부터 나와!"




작가의 이전글 공항상담소의 비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