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면 가고 싶은 남대문 시장
SNS에서 재미로 보는 '집순이력 테스트'가 있었다. 문제를 풀다가 보기를 보고 웃음이 터져버렸다.
Q. 친구와의 약속이 갑자기 취소된 당신의 행동은?
- 아쉽다고 말하지만 묘하게 안도하는 표정으로 잠옷으로 갈아입는다.
(단, 친구가 보고 싶지 않은 건 절대 아님 주의)
집순이들의 여러 유형 중 하나였구나 내심 공감이 갔다. 밖에 나가면 잘 안 들어오고 집에 들어가면 잘 안 나오는 집순이인 나. 날 잡아 노는 것도 좋아하지만 집에서 사브작 사브작 지내는 시간을 즐기는 편이다.
그런 나에게 '나가고 싶다'라는 마음이 든 건 두 달 정도 몸이 아프면서 (이유 없는 몸살+감기+비염 등등)였다. 노는 것은 둘째치고 일상생활을 할 기력도 입맛도 없었던 적은 살면서 거의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획기적으로 살은 빠지지 않았다.)
옥상달빛의 노래 <자기소개> 가사가 생각나는 나날이었다.
어느새 시간이 흘러서 40이 됐어요
체력은 약해지고
소화도 늦어졌죠.
예쁜 걸 봐도 감동이 줄었어요
살은 안 빠지고
이젠 밤도 못새
그래도 우린
작은 기쁨과 행복이 인생의 전부란 걸 알게 됐어요.
두어 달을 감기와 염증 어디쯤에서 허우적대다 몸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니
해라도 좀 쨍하다 싶으면 어디든 나가고 싶어졌다.
나 남대문 시장에 가고 싶어.
친구에게 먼저 이런 문자를 보낸 건 처음이었다. 친구들이 만나자 하면 약속에 따르는 게 편한 나였는데 한 움큼 몸을 앓고 나니 또 언제 아플지 모르니 나가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아이의 등하원을 남편에게 맡기고 편한 신발과 옷을 입고 지하철을 탔다. 영종도로 이사 온 후 처음 나가는 서울이다. 출근시간을 살짝 비껴간 오전시간에는 김포공항으로 향하는 캐리어 가방들이 쪼르르 탑승을 기다리고 있다. 창밖은 물이 들어온 바다와 멀리 섬도 보인다. 여행자의 마음처럼 달떴다.
남대문 시장을 찾는 이유 중 하나는 아동복 거리 때문이다. 아이에게 필요했던 옷과 머리핀, 원피스, 양말을 고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 날 만큼은 현금을 뽑아가 정해진 금액 내에서 적게 고민하고 산다. 키보다 높이 쌓여 있는 물건들의 색깔이 마치 퍼즐처럼 그러데이션 되어 있을 때, 한 가지 분야만 백 년 동안 취급했다는 소품가게에 들어갔을 땐 숨은 무림 고수의 비법무술을 전수받는 것처럼 황송한 마음으로 구경하게 된다. 중간중간 기름에 과하게 튀긴 야채 호떡과 선이 굵은 하얀 쌀떡볶이와 튀김 순대도 곁들여줘야 몸과 마음이 탱글탱글해진다.
영화 <가여운 것들>을 본 어느 평론가는 '집을 나간다'는 것에 의미를 설명했다.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 실험체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던 주인공 벨라. 어떠한 계기로 집을 떠나게 된다. 이 부분은 헨리크 입세의 희곡 <인형의 집>이 설정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주인공 로라가 정형화된 인형의 삶을 등 뒤로 하고 집을 나가는 장면은 눈을 반짝이며 "세상을 탐험하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벨라와 닮아 보였다.
집을 나갔다 들어와서 (삶의) 주인이 된다
고작(?) 남대문 시장에 다녀온 것을 거창하게 '집을 나갔다'라고 할 수는 없지만 집순이력이 꽤 높은 나에게
몸이 근질거려 나가고 싶어 하는 이 마음이 참 신기하고 봄처럼 반갑다. 내 공간과 주변을 살피기에 바빴던 나를 뒤로 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 하고 싶은 것을 실행해 보는 시간은 뜻밖의 생기를 주었다.
점점 주기적으로 '집을 나서야 좋은' 계절이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