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자전거가 생긴 날
"엄마 난 지금이 밤인 줄 알았어."
아침잠을 달게 자길래 못 깨우고 있었던 참이었다.
깜짝 놀라 눈을 뜨더니
"밤인 줄 알았는데 아침이었네. (씨익 한 번 웃고)
엄마가 달걀을 넣어서 김밥을 또르르~ 말았는데... 깼어."
먹성 좋은 아이는 아쉬움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잠을 온전히 다 깨지 않은 아이는 탐스럽게 예쁘다. 두 볼은 잘 익은 복숭아처럼 발그레하고
토실토실한 다리는 상체와 다른 방향으로 기이하게 놓여있다.
말랑말랑한 팔을 주무르고 살짝 단단해진 다리를 쭈욱 펴본다. 배에 얼굴을 대면 떠껀~하다.
입으로 뿌우~ 불면 까르르 웃는다.
따뜻한 아이의 몸을 안고 뒹굴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모습만으로도 사랑스럽지만 그 동그란 입에서 나오는 말이 더 예쁘다.
"와~ 공기가 상쾌하다아."
킥보드로 씽~ 내려오며 숨을 들이마신다.
"저기 둥지다! 새가 나무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둥지를 만들고 있어."
새로 이사한 우리의 둥지는 셔틀버스 정류장과 가까워서 여유가 좀 있다.
가는 길에 민들레도 불고 둥지도 구경하고 아침을 만끽한다.
출근길이 오늘만 같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아마 오늘이 금요일이라, 내일은 등원시간을 맞추지 않는
자유의 날이라 기분이 더 좋아 보인다.
"엄마, 자전거 연습을 많이 했더니 킥보드를 탈 때 자꾸 손을 이렇게 돼.(손잡이의 브레이크 잡는 시늉)"
이제 다룰 수 있는 것이 하나 더 늘었다는 뿌듯함이 배어있다.
"엄마는 왜 자전거를 못 타?"
못 타는 것보다 왜 타보려고 연습하지 않았던가 생각한다. 아빠는 왜인지 모르겠지만 여자아이에게 자전거는
안 좋다며 안 가르쳐주신 것 같다. (대신 아빠와 배드민턴을 치거나 등산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 후로 탈 생각을 별로 하지 않은 건지 기회가 없어서 인지 '자전거를 못 타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자전거를 못 탄다고 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도 웃기고. (왜요? 놀라거나, 아~ 왠지 못 탈것 같다는 표정)
요즘 들어 동네에서 자전거를 타는 엄마들을 보면 보기 좋다. '씩씩하고 건강한 엄마'의 상징처럼 느껴진달까. 내가 갖지 못한 부분이라 더 빛나 보인다.
아이가 오랜만에 바지를 입어서인지(만 4세 루아가 지금껏 입은 바지 횟수가 열 번이 되지 않음)
양갈래로 땋은 머리숱이 많아 보여서 그런지 요즘 부쩍 자란 것 같다. (키였으면 좋겠지만 다른 의미로;;)
넘어질 듯 종종걸음으로 층층이 겹쳐 입은 치마를 입은 아가였었는데...
나아가는 아이의 뒷모습이 기특하면서도 어쩐지 서글프다.
아이를 '안아준다'였다가, 아이가 '안겨온다'.
그러고는 결국 아이를 '안아보았다'로 변해가는 걸까. _고수리, <선명한 사랑> 중에서
낮잠은 물론이고 밤잠이 없어 아기를 안고 책장에 기대어 졸았던 그때.
말이 안 통해서 부둥켜안고 목 놓아 울었던 야만의 시대.
아기는 이제 아침잠까지 푹 자는 언니가 되어 간다. 온통 엄마만 그리던 그림에는 이제 이야기가 생겼다.
바닷가의 노을, 캠핑장에서 본 나비, 텐트를 꾸민 반짝이는 전구와 불꽃처럼 말이다.
조금 있으면 혼자 자겠다고 하겠지. (아직 나도 분리가 안 됨)
달력 넘기 듯 아이가 자라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것 같아 두렵지만 한편으로 어떤 소녀로 자랄지
기대가 된다. 친구와 교환일기를 쓰고 좋아하는 가수가 생기겠지. 그때 난 어떤 엄마가 되어 있을까?
지금처럼 엄마가 어떤 모습이든 아이가 여전히 나를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
"엄마, 빨리 와. 늦겠어."
앞에 서서 재촉하는 아이가 금방 초등학교라도 들어갈 것만 같아 뛰어가 한 번 안아 본다.
아직은 다행히 말랑한 아기다.
"나 자전거 있어요!"
셔틀버스에 오르며 앞 뒤 생략하고 자랑부터 하는 게 영락없는 어린이다.
머릿속에 온통 새 자전거 탈 생각으로 버스를 탄 아이에게 손을 흔든다.
오늘도 잘 다녀와. 나의 어린이.
사람들이 각자 자기 방식으로 살아가는 우주는 활기차다.
서로 달라서 생기는 들쭉날쭉함이야말로 사무적으로 보일만큼 안정적인 질서다.
그런 우주 속에서 살아간다는 게 나는 안심이 된다.
우주가 우리 모두를 품을 수 있을 만큼 넓다는 사실도.
-김소영 에세이, <어린이라는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