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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미 May 23. 2024

무거운 것을 가볍게 들어 올리는 힘

나의 첫사랑 같은 그림책


"교육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을 때 

우리는 얼마나 훌륭한 교사였던가!"


                            - 다니엘 페나크, <소설처럼>


 '부모가 교사가 될 때 아이와 멀어지기 시작하는 것 같다'는 그의 말이 맞는 것 같다. 

지난 며칠간 아이는 종종 사춘기의 워밍업처럼 엄마에게 불친절했고

그런 아이에게 나는 중학생 짝꿍에게 말하듯 조목조목 따지기도 하고 짜증도 냈다. 


자신이 그린 그림이 갑자기 마음에 안 들어 찢어버리고 싶다고 했고

찢어 버리면서 하는 말이

'엄마가 내 그림을 안 좋아하니까.'란다. 


하원길에 조잘조잘 얘기하던 입은 꾹 닫혀서 

"엄마랑 말하기 싫어. 혼자 살고 싶어."

라는 말에 억울했다. 


아이스크림을 사거나 혼자 잠깐이라도 남겨졌을 때 

내 바지 옆선을 꼭 잡는 것을 보면

아직 아기가 분명한데 잠든 아이를 보며 후회한다. 


너무 나랑만 노는 게 아닐까?

요즘 들어 책을 너무 안 읽는데...

이맘때 쯤 해야 하는 교육을 나만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이의 작은 반응까지 너무 일일이 대응하고 있는 건가?



중간점검처럼 찾아온 심란함에 수혈이 필요했다. 

마침 예약한 책이 왔다는 알림 메시지에 책을 한 보따리 집어 들고 올 생각으로

편한 가방을 메고 도서관에 갔다. 


차오왼위쉬엔 글/ 이수지 그림, <우로마> 



차오왼위쉬엔 글/ 이수지 그림, <우로마> 


 

그림책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 

내가 씨름하던 것들을 가볍게 들어 올려 단순한 마음으로 전해준다. 그것도 아름답고도 귀여운 그림으로 어렵지 않게 얘기해 준다. 어느 때는 내가 생각하는 예의바름, 상식으로 설득하는 게 아니라 아이를 향해 무조건적인 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것도 필요하다고. 그렇다고 해서 아이가 이기적인 인간으로 자라는 게 아니라 엄마의 지지를 자양분 삼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요즘 (그림책) 뭐 봐?"

가끔  친구들이 물으면 신이 난다. 이것도 귀엽고, 이건 내가 좋아하는 거고...

하면서 대여섯 번쯤 메시지가 오가면 

"이거 다 아이가 보는 거야?" 묻는다. 

대답은 전혀. 

내가 보고 있을 때 스멀스멀 다가오거나 잘 때 읽는 한 두 권이 전부다.


그림책은 내게 첫사랑 같은 존재다. 문득문득 지나간 인연이 생각나는 것처럼. 

길이 막혔다는 느낌이 들 때 그림책이 나에게 은근슬쩍 던져준다. 그 방법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 멋지고,

무겁지 않아 좋다.


그림책에 관심이 생긴 건 교육방송 이후 채널을 옮기고 한 번째 유아프로그램부터였다.  

(이름마저 추억 돋는) <뽀뽀뽀>의 그림책 코너를 맡았다. 매주 책을 선정해서 저작권 섭외부터 책을 재구성해 애니메이션 화하고 중간중간 아이들과 독서 놀이가 있는 종합구성물이었다.  몇 주간 칭찬도 욕먹음도 없이 

밋밋하게 코너를 끌어오다가 에즈라 잭키츠, <눈 오는 날>을 만났다. 

이 책은 그냥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었다. 

쓰고 또 고치고 애니메이션 감독님과 계속 상의해 가며 만들었다. 


"나 책 보다 이 느낌이 좋아. 고생했어."

나의 대본을 매번 니맛도 내 맛도 아니라며 신랄하게 평가하던 선배의 한마디에 의욕이 생겼다. 

매주 토요일 아침, 집 근처 대형서점에 가서 그림책을 만나고, 아이들과 부모님을 관찰했다.(그땐 4살 조카와 함께 살고 있어서 육아를 안다고 생각했지만, 육아의 육자도 모르던 때가 맞다)

자료조사였지만 그림책을 보는 시간이 훨씬 길었고, 그림책에 담긴 유머와 진심에 반했다. 그림책은 아이만의 책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 느꼈다. 


일 년 남짓 코너를 이어오다 출판 저작권의 문제로 아쉽게 방송은 끝내야 했지만 

그림책은 생각만 해도 좋은, 언젠가 한 권의 그림책은 쓰고 싶다는 오랜 꿈으로 간직해 왔다. 

그렇게 첫사랑을 끝내고 그때그때 닥친 일들을 해결해 오다 다시 육아를 위해 그림책을 본다. 



하원 후에 아이와 함께 할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아이스크림 틀과 모양 찍기 도구,  색이 예쁜 데코팬을 골랐다. 셔틀에서 반쯤 감긴 눈으로 내린 아이는 졸리고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고 칭얼댔다. 아이를 꼭 안아주자

놀이터에 가야겠단다. 놀이터에서 모르는 언니들과 한참 개미를 구경하고 그네를 타더니

"자, 이제 아이스크림 만들까?"


 집에 돌아와 혼자서 손을 씻고 옷도 갈아입고 아이스크림 만들 준비를 끝냈다. 

"오늘은 기분이 좋아?" 하고 물으니

"엄마가 편안해 보여서 좋아. 엄마랑 단둘이 있어서 더 좋아."


엄마의 작은 표정까지 살피던 아이가 어쩌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거라고 생각하니 조금은 미안하다. 

나의 느림보 육아는 '그냥 대충 이렇게 하면 되지 않겠나?'라는 마음으로 가다가 한 번씩 아이를 통해 브레이크를 걸어주는 패턴인가 보다. 중간중간 그 깨달음이 너무 늦지 않기를 바란다.  




*최근에 본 귀여운 그림책 목록


손소영, <홀짝홀짝 호로록>

양선, <반짝이>

황인찬 글/ 서수연 그림, <백 살이 되면>

서현, <풀벌레 그림책>

김종원 글/ 나래 그림, <나에게 들려주는 예쁜 말>

호아킨 캄프, <시소>

이상교, <아주 좋은 내 모자>

앤 리처드슨 글/ 안드레아 안티노리 그림, <문어 뼈는 0개>

백승연 글/ 윤봉선 그림, <넌 토끼가 아니야>


** 팬심으로 집었다가 재밌게 읽은

이수지 그림책 작가님이 쓴 에세이 <만질 수 있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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