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둘, 나의 조카에게
놓여있는 모양 그대로
바라보기
조각내지 않기
보여줘도 모르는 사람이 되지 않게
흰 천을 걷자 청귤이 있습니다
당신은 내게 사랑의 모습으로 오는군요
청귤을 보는데 심장에 화살을 꽂고 걸어오는 맹수가 보여요
어린 나를 물고 한 발 한 발 오고 있어요
구해달라는 말인 것 같아요
-안희연의 시, '청귤' 중에서
여름의 시작이 뜨겁다 못해 쓰리고 아프다.
꿈에서 깨어나도 여름.
깊은 물속에 나를 두고 와도 여름. (_안희연의 시 '터트리기' 중)
책을 봐도 전시를 봐도
계속 너와 연결 지어 생각하게 된다.
무엇이 너를 그렇게 생각하게 했을까.
왜 모든 것을 놓고만 싶었을까.
스물둘의 막막함은 모든 게 끝이란 생각까지 들게 하지만
그때의 생각은 수많은 밤의 일부분이었어. 이건 정말이야.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좌절만 남았다면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도 생각해 보자.
아니 지금은 생각 같은 것 하지 말자.
생각이 만든 굴레에 갇히지 말고
그저 생각을 멈추고 감상만 하게 되는 것들을 해볼 순 없을까.
수능 시험 마지막 교시가 끝나고
책상에 엎드리며 후~ 한숨을 몰아쉬는데
방송에서 음악이 나왔어.
"크리스마스에는 축복을~ 크리스마스에는 사랑을~"
아직도 그 음악을 들을 때마다
울렁거리던 그날의 체기,
열아홉 해를 시험지 몇 장으로 평가받은 것 같은 허무함에
눈물이 주룩 나오더라.
그게 마치 끝인 것 마냥.
십대에는 두 갈래였던 길이
걸으면 걸을수록 수많은 잔가지들이 생겨나.
나도 몰랐던 일을 해보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수도 없이 갈라져 나와.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실패가 절대 아니라는 걸
스무 해가 더 지내고 나니
확신할 수 있어.
시간이 지날수록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바뀌어.
그래서 지금 매달리는 것들이
절대적일 필요는 없어.
하고 싶은 말도
닿고 싶은 감정도 정말 많은데
정작 네게 도움이 필요할 땐 내가 없었던 건 아닐까.
나의 어린아이를 돌보면서
너의 네 살, 다섯 살. 함께 지내온 날들이 아른아른하다.
겁쟁이 이모는 아무 말도 못 하면서
너를 생각하고 기도하고 있어.
지금 네 나이였던 스물둘,
나는 너를 처음 안아봤어.
작은 몸에 동그란 얼굴, 예쁜 조개턱을 가진
나의 보물 1호.
네가 보고 싶어 주말마다 서울에 올라가고
급기야 십 년을 함께 살았지.
너의 모든 성장 사진을 싸이월드에 수집했어.
어떻게 하면 너의 마음에 새싹이 돋아날까.
선명한 초록빛 여름을 느끼고, 다르게 생각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
땀에 절어 끈끈해지는 목덜미
잠들 수 없는 열대야 같은 너의 마음에
가을바람 한 줄기라도 만나기를 바라게 되는 여름이야.
"밤에 작품을 제작할 때, 방의 불빛에 이끌려 창문에 벌레들이 잔뜩 붙어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벌레의 배가 보이는 게 재미있어서 관찰하고 있는데,
창에 내 모습이 비치는 게 보였다.
벌레가 '넌 스스로 살아가고 있니?"라고 묻는 것 같아서 가슴이 철렁했다.
나와 벌레가 동시에 비치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같은 생명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때부터 나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