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바리의 맛
“이 집이 동네 사람들만 아는 맛집이에요. 이상하게
한 번 먹으면 자꾸 생각나더라고요.”
마천시장 안쪽에서 칼 비빔국수를 먹었다.
먹을 때는 “맛있다.” 정도였는데 시간이 지나니
달큰한 소스에 손으로 뽑은 구불구불한 칼국수 면의 쫄깃함이 자꾸만 생각난다.
이사온지 일 년 반 만에 동네 토박이를 만나
동네 맛집을 소개받았다. 어린이집 등 하원 길에
조신히 눈인사만 주고받은 사이인데 혼자 다니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점심을 함께 먹자 제안해줬다.
만나기 전까지 옷차림을 어떻게 할지(늘 외출복과 잠옷의 아슬한 경계에 놓인 초라한 등원 룩이어서) 브런치 형태의 메뉴를 고를 것인지
사소하지만 살짝 설렘도 있는 첫 만남이었다.
“국수 괜찮죠? 따라오세요.”
좁고 복잡한 시장 골목 끝자락 줄이 길게 선 국숫집이었다. 식사를 한 후 미로 같은 시장을 단숨에 빠져나와 한적한 카페로 안내하는 뒷모습이라니!
이런 게 나와바리의 힘인가!!
내가 단박에 반하는 순간이다.
자신 있게 취향을 소개하고 이끄는 사람.
길을 잘 찾는 사람. 운전을 잘 하는 사람.
앞장선 그녀와 친구 둘. 그들의 대화를 듣자 하니,
그 인연은 중학교 때부터 시작되었고 지금은 남편들까지 친구가 되어 고만고만 동네 어귀에 둥지를 잡게 되었다고 한다.
내가 나고 자란 곳에서
아이를 키우는 건 어떤 기분일까?
“여기는 엄마가 좋아하는 산책길이야.”
“여기 만화책방에서 엄마 인생 책을 만났지.”
대를 이어 소중한 공간을 공유할 수 있는 것.
학창 시절 친구들과 함께 육아를 하고, 힘들 때
시도 때도 없이 엄마 밥을 먹을 수 있겠다! 생각하니
너무나 부러워졌다.
십 대부터 나는 늘 고향을 떠나기를 꿈꿨다.
잡지에 나오는 동네를 내가 사는 곳처럼 자연스럽게 걷는 서울 사람을 동경했다. (당시 쎄씨 같은 패션잡지에는 강남 강북의 스타일을 나눠 소개하기도 했다) 보고 싶은 공연이나 전시가 생겼을 때 기차표를 예매하지 않아도 되는 거리를 꿈꿨다.
나름의 노력과 운으로 내가 보던 잡지 공모전에
당선되고, 잡지에서만 보던 패션리더들이 간다는
압구정으로 출근 이란 것도 하면서 서울 사람(?)의 길로 들어선 것 같아 우쭐한 적도 있다. 스크랩을 할 정도로 팬이었던 영화 잡지에 인터뷰도 해보고
흥미로운 이벤트는 다 서울에서 생겼다. 돈도 없고 집도 없는, 밤샘이 일상인 20대였지만 꿈을 이룬 것 같은 착각이 들었었다.
아이를 낳아서인지 나이가 들어서인지는
모르겠다. 이 젊은 동창생들의 동네 추억과 현재를 마주하니 내가 살던 곳이 그리워졌다.
친구랑 먹으면 늘 취한 기분이 들었던 바로그집
떡볶이. (알코올이 들었나 했는데 생각해보면 과식의 느낌이었던 것 같다)
하교할 때 방앗간처럼 들렀던 <책과 음악사이>
_서점과 음반가게가 함께 있던, 젊은 삼촌 즈음으로 보이는 주인아저씨가 인사라도 해주면 조금 떨렸던 것도 같다.
다시 돌아와서. 지금은 오금동에 살고 있다.
아기가 태어나고 남편의 갑작스러운 이직으로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나에게 오금동은 H.O.T 강타 오빠가 살던 곳.
콘서트가 많이 열리는 올림픽 공원이 있고,
잠실역과 멀지 않다는 정보뿐이었다.
새로 온 동네를 둘러보기도 전에
코로나19로 아이와 꼼짝없이 집에서만 지냈다.
성내천 산책만이 유일한 동네 구경이었다.
일 년이 지나고 아기를 어린이집에 맡겨야 하는데
동네 친구도 없고 엄마들의 알짜정보가 그득하다는 송파맘 카페에는 가입조차 되지 않았다.
(아직도 빗장을 꼭꼭 걸어 잠그고 회원가입을 받지 않겠다는 팝업창이 뜬다. 세상 단호해)
동네에 믿을만한 어린이집을 찾아야겠는데
지금 어린이집을 보내는 게 맞는 것일까 하는
생각부터 속을 울렁거리게 했다.
머리가 복잡할 때 무조건 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모자를 눌러쓰고 성내천을 걷고 또 걸었다.
걷다가 유모차만 보면 물끄러미 아기를 찾게 되고
그러다 엄마와 아가랑 인사를 나누고 가끔 연락처도 따였는데, 연락처를 공유한 김에 괜찮은 병원과 어린이집을 물어보았다.
어떤 끌림이 있었는지 신기하게도
나처럼 다 갓 이사 온 엄마들이어서 큰 정보는
없었지만 왠지 모를 위안이 되었다.
‘아 나만 헤매는 게 아니구나.’하는
여차저차 심란한 겨울이 지나고
6개월이 지난 지금, 아이는 어린이집을 거의 일등으로 (가끔 선생님과 출근길에 만나는) 출근도장을 찍으며 즐겁게 다니고 있다.
나는 또 어떤 동네에 머물게 될까.
나의 아이는 어떤 환경에서 자라게 하는 게 좋을까.
고민의 끝은 늘 내 집 마련의 씁쓸함으로 귀결되지만, 아이가 친구들과 동네를 추억하고
동네만의 맛을 찾을 수 있는 곳이었으면 좋겠다.
하아. 과연
이번 생에서 정착할 둥지가 생길 것인가.
에라이~ 칼 비빔이나 한번 더 먹어야겠다.
ps, 같이 사는 친구에게
“로컬 맛집을 보여주마.” 호기롭게 시장으로
데려갔는데 휴무로 문이 닫혀 있었다.
돌아오는 한마디,
“이 정도로는 이제 식상하구나.
좀 색다른 머피는 없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