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어머니, 올해 김장은 언제 해요?

김장과 시어머니에 관한 주관적 고찰

by Lou



"김장 혼자 하시지 말고 꼭 부르세요”

“됐어. 올해는부터 안 할 거야 힘들어서. 신경 쓰지 마”

“그래놓고 혼자 하지 마시고 연락하세요 병나요”

“알아서 한다니까. 신경 쓰지 말고 몸이나 잘 챙겨”


며칠 전 시아버지 생신에 가서 혹시나 싶어 신신당부를 했다.

작년 김장까지 도와드릴 때도 있었고 혼자 하실 때도 있었지만 시어머니가 먼저 올해 김장은 없다고 미리 선언하셨다.

입맛이 까다로운 시아버지 맞춰드리느라 파김치, 순무김치, 깍두기, 열무김치, 알타리 김치, 물김치 등등

다양한 김치를 수시로 담가 드셔야 하는 시어머니

3주 전. 시어머니 생신에 가니 알타리 김치 해두고 큰 손자 좋아한다고 게장 잔뜩 만들었다며 바리바리 다 싸주신다

그리 멀리 살지 않아 자주 찾아뵙는데도 항상 싸줄 반찬들을 준비해 두신다.

손도 어찌나 크신지 한 번 음식을 할 때마다 양이 엄청나서 조금만 덜어주신다는데 양이 결코 적지 않다는 점

음식 만드는 걸 좋아하지도 잘하지도 않는 엄마에게 태어났지만 맛있는 반찬을 자주 해주시는 할머니덕에 잘 먹고 잘 크는 우리 아이들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치를 많이 안 먹는 우리 집 남자들 덕에 매년 김장김치를 다 먹는 일이 여간 힘든 게 아닐 수 없다.

반찬으로 어쩌다 저녁식사에 한번 정도 먹게 되니 김치를 잘 소비하려면

남편과 술안주로 먹거나 찌개를 잔뜩 끓이던가 김치찜을 한솥 만들어 일부러 챙겨 먹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자식과 손자들 먹이고 싶어 하시는 고생과 정성을 알기에 무조건 거절할 수도 안 먹고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래저래 갖은 방법을 동원해 먹기도 하고 주변에 필요한 이웃이 생기면 인심 좋게 넉넉히 나눔도 하며 고군분투하게 만드는 김장김치라는 요물



결혼 전 엄마가 김장을 하시면 힘든 일을 혼자 하시는 게 안쓰러워 자처해 도맡았지만 굳이 힘들게 매년 김장을 왜 하는지 의문이었다.

통마다 가득 채워 쟁여두고 한 번씩 꺼내 먹어야 하는 손 많이 가고 귀찮은 데다 가끔은 처치 곤란해 보이는 일련의 작업들을 계속해야 하는 건지 답답했다.

질문해 봐야 겨울 전에 당연히 김장을 해야 내년까지 두고두고 먹지 라는 답이 돌아올 게 뻔하니까

김치 좀 안 먹고살면 어디 탈이 나는 것도 아니고 반찬이 없는 것도 아니고 밥을 못 먹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아주 옛날에야 겨우내 먹을 음식이 변변치 않으니 그렇다 치고 부모님 세대에는 사 먹는 음식이나 반찬이 흔하지 않아서 필요했을 거라 생각된다.

지금은 다 만들어진 반찬을 집 가까운 반찬가게에서 다양하게 구입할 수 있다. 식구가 적을 때는 재료를 사서 만드는 것보다 비용과 노력이 훨씬 경제적이다.

대형 마트에는 각종 김치와 반찬들이 종류별로 포장되어 판매하는데 맛도 있고 휴대성도 좋아 여행 갈 때 가져가기도 안성맞춤인 요즘

굳이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불편한 상황들과 각종 논란을 야기하면서까지 매년 김장을 고수하는 이유가 뭘까


신혼에는 마냥 귀찮고 수고롭게 느껴졌던 김장과 김치가 올라와야 하는 한국인의 식탁

쑥 커버린 아이를 둔 40대 엄마가 되고 보니 섬광처럼 스친 다른 관점 하나.

자식을 위해 뭐든 해주고 싶은 것이 엄마 마음

다 큰 자식도 뭐가 그렇게 아쉽고 부족 보이는지 끊임없이 내어주고 싶어 하는 마음

엄마의 손이 자잘하게 많이 가서 때론 귀찮게도 했던 어린아이들이 어느새 훌쩍 자라면 엄마가 해줄 수 일들이 줄어든다

아이들 스스로 자신의 일상을 주도해 나가기에 엄마의 자유시간이 늘어나는 장점이 있다.

대신 엄마가 아이와 돈독하게 지내던 시간이 줄어들다 보니 정성 가득한 음식이라도 먹이고 싶은, 엄마가 해줄 수 있는 사랑의 표현이 아닐까

말로는 다 하지 못하지만 밑반찬하나 김치하나 엄마의 정성과 마음을 담아 사랑을 표현하는 또 다른 방법 말이다





지난 토요일 오랜만에 즐거운 혼자만의 외출로 신이 났는데 시어머님 문자가 도착했다

시아버지 병원 때문에 평일 하루 남편이 시댁에 가기로 한 날. 남편에게 김치통을 보내라고

다음 날이 일요일이니 가서 김장을 돕겠다고 문자를 보내고 받아 든 답장




여전히 일도 다니시고 허리도 손도 아프신 분이라 문자를 보고 잠시 멍해졌다.

굳이 힘든데 안 하셔도 될걸 우리 주신다고 따로 담아 놓으셨다니 대략 난감

건강하고 씩씩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럽던 며느리가 유난히 올해 많이 아프고 수술도 자꾸 하니 마음이 많이 쓰이셨나 보다

몸도 편치 않으신데 나이 든 자식 힘들까 봐 혼자 힘든 내색 없이 무어든 내어주시는 사랑에 감사함이 가득해졌다.

남김없이 맛있게 잘 먹으면 되지 스스로 위안하며 어머님께 온갖 미사여구를 가미해서 감사한 마음을 가득 표현했다.



김장은 많은 힘과 노력이 드는 ‘일’이다. 힘도 시간도 과정도 많은 어려운 일이지만 사랑하는 가족을 위한 일이기에 기꺼이 하는 것이리라

누군가에게는 힘들고 부담이 되는 큰 행사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힘들어도 내가 자진해서 하고 싶은 일이다.

그런 배경에는 어른인 시어머니께서 먼저 넉넉하고 따뜻한 마음을 내어 베푸셨기에 며느리도 감사한 마음으로 더 적극적일 수 있는 것이다.

서로를 위한 진심을 마음에 담아 표현한다면 김장이나 명절마다 되풀이되는 긴장과 불편한 설왕설래가 사라지지 않을까 감히 생각해 본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언어라는 세상으로 내딛는 걸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