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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u Oct 02. 2024

아줌마! 부르지 말라고!

프레임을 벗어나고 싶은 몸부림


“거기 아줌마! 빨리 앉아요!!”

둘째가 돌이 지나고 나서야 장롱면허를 탈출했기에 매일 고열과 구토를 달고 사는 신생아였던 큰 아이를 품에 안고는 매번 뚜벅이로 병원을 다녀야 했다. 새벽배송이 없던 시절, 분유나 기저귀가 떨어지면 급하게 버스를 이용해 근처 마트로 가야 했기에 그날도 황급히 아이에게 필요한 잡다한 물건들만 대충 챙겨 들고 버스에 올랐다. 급하게 출발해야 하는 버스 기사님은 미처 자리를 찾지 못해 좌석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나에게 소리를 크게 질러댔다. 안 그래도 지친 몸과 마음에 아이까지 품에 달고 버스에 오르자마자 들려오는 커다란 “아줌마”라는 외침에 이유를 알고 있으면서도 울컥 솟아오르는 마음에 창피함이 더해졌다. 얼른 자리를 찾아 앉으며 혼자 소심하게 마음속으로 외쳤다.

“아줌마라고 소리를 질러 부르면서 화를 낼 필요까지 없잖아요. 열심히 빈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는데..”







고슴도치 하면 뭐가 떠 오르는가? 아이들에게는 가시가 돋쳐 있어도 귀여운 동물, 엄마들에게 흔하게 의미하는 고슴도치 엄마가 가장 먼저 떠오르지 않을까?

‘고슴도치 엄마’ 란 자기 자식을 무척 아끼고 귀여워하는 엄마.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고 한다’와 같은 속담에서 비롯된 말이다.


애살 많은 엄마라 놀림받았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애살이 자꾸 흩어지는 걸  보니 고슴도치 엄마를 벗어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순간들이 있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함함하지 않는 상황이 점점 늘어나고 있기 때문일 거다. 사춘기를 향해 달려가는 아이들도 그걸 지켜봐야 하는 엄마도 24시간 곤두선 촉각으로 피곤하게 살아가다 날카로운 촉수들이 뒤엉키는 순간이 오면 서로를 타박하기 바쁘다. 그걸 지켜보며 참고 또 참던 남편이 듣다 못해 한 마디 거든다. “오늘 유난히 예민하게 반응한다.” 가끔씩 꾹꾹 눌러 참던 말을 뱉어내는 말인걸 알지만 화나 머리끝까지 나있는 상황에서 그런 말은 속에서 활활 타오르던 불덩이에 기름을 들이붓는 기폭제가 되어버린다. 이왕 참은 김에 모르는 척해주면 안 되겠니?


조급하고 예민하던 성격이 임신과 출산을 겪으면서 감정변화가 수천번 정점을 찍으며 출렁인다. 워낙 성격 자체가 예민하고 하루에도 수번씩 롤러코스터를 타는 성향임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기에 그런 상황을 피하고 참아보려 노력해 보지만 천방지축 두 아들은 제어장치를 툭하면 끊어버리기 일쑤다. 시간차 공격도 아니고 번갈아가면서 이럴 수가 있을까. 세상에서 가장 아끼고 사랑해야 할 내 아이와 내 편이 되어주어야 할 남의 편으로 인해 수시로 화가 터져 나오는 아줌마가 되어버렸다. 장수하는 할머니들의 비결이 일찍 돌아가신 할아버지라는 이야기에 박장대소를 하는 일이 한 편으로는 슬프지 아니한가? 서로가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세상이길 바라는데 점점 타인도 가족도 불편한 존재가 되어간다.






태어나면서부터 가부장적인 아버지에게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듣던 말들은 온몸에 독처럼 퍼졌다. 딸은 잘 자라서 좋은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두어 명 낳아 남편 뒷바라지를 잘하면서 아이를 잘 키우면 된다고. 집안일과 요리에 전혀 재능과 흥미 없음을 매번 마음에 안 들어하셨다. 하지만 해보려 노력을 해봐도 못하는 데다 도무지 하기 싫은 걸 어쩌란 말인가. 미래의 꿈이 ‘현모양처’라는 친구의 발표를 들었을 때 충격적이었던 기억이 있다. ‘현모양처’라는 단순한 단어의 의미만으로도 절망적인 느낌이 온몸을 휘감고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 같았기에 단어 자체를 부정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억척스럽게 희생이 몸에 배어버렸던, 누구의 도움도 받기 힘든 어쩔 수 없는 환경에 놓여있던 엄마는 교직생활과 집안일 그리고 육아를 전부 도맡아 해내야 했다. 그런 엄마를 보면 존경과 함께 연민이 동시에 마음을 오가고 막연히 엄마가 되면 그렇게 살아야 되는 건가 아득한 생각이 들었던 적도 있었다. 몸과 마음이 성장하고 생각이 자라면서 그 안에 가득 채워진 내 이성은 ‘가족을 위해 희생만 해야 하는 사람이 엄마라면 되고 싶지 않다’였다. 정말 내 미래의 모습이 그런 모습이 되는 것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나의 존재는 무의미해진 채 가족만을 위해 그림자처럼 희생하며 살아야 하는 삶이 아닌 언제나 내가 주인공이 되어 누군가의 도움에 기대지 않고 주체적인 삶을 살아내고 싶었다.




어느새 원하지 않아도 나이가 들어가고 ‘아줌마’라는 나이에 들어섰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40대 중반을 향해 달리다 보니 몸은 하루가 다르게 나이가 느껴진다. 그래도 다행인 건 육체의 변화와는 반대로 마음은 훨씬 평안하고 더 나은 미래를 지속적으로 꿈꿀 수 있게 되었다는 거다. 오히려 막연히 불안하던 20대 때보다 더 계획적이고 실행적이 되었다. 살아온 시간만큼 체득하고 고민한 결과들이 출산과 육아를 통해 더 버무려지고 단단해진 것이다.  그저 주어진 삶과 정해진 시간에 끌려가며 홀로 고군분투하던 때와 다른 모습으로 또 다른 삶의 방향을 찾아 계획하고 노력하는 모습에 아이들도 응원을 보태준다. 여전히 명확한 미래가 보이는 건 아니지만 스스로 현실에 안주하거나 주저 않지 않고 노력하며 나아가는 모습에 느껴지는 뿌듯함은 덤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남편과 아이들이 각자의 자리로 떠나면 나도 스스로 만든 내 자리에서 나만의 시간을 최대한 활용한다.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모든 상황을 잠시 잊고 몰입을 할 수 있고 그렇게 쌓인 하루하루가 유의미하게 쌓여간다.


처음 아이들이 기관을 다니며 잠시라도 생긴 틈새를 이용해 수시로 책을 파고들었다. 사회와 단절된 생활 속에서 책을 만나는 순간은 숨을 쉬고 살아있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주변 지인들은 아이들 없을 때 잠시 한숨 돌리고 집안일을 하고 쉬면 될 걸 골치 아프고 피곤하게 무슨 책을 읽냐고 했지만 1분 1초 흘러가는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기에 아깝기 그지없었다. 집안일도 아이들을 챙기는 일도 놓치거나 게을리하지 않았고 조금이라도 나만의 시간이 생기면 알차게 ‘나를 위해서만’ 쓰고 싶었다. 그 순간만큼은 ‘엄마’가 아닌 ‘나 자신’으로만 존재하니까.




쉽게 사용하는 ‘아줌마’라는 용어에는 따라오는 의미가 긍정적 이기보다 부정적인 사회적 인식이나 프레임이 많이 씌워져 있어 가끔씩 ‘아줌마!’ 하고 지르는 소리에 불편한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사전에 명시되길 ’ 아주머니’를 낮춰 부르는 용어 ‘아줌마’. 누군가의 아내이자 엄마이고 소중한 가족으로 집안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존재에게 ‘아줌마’ 보다 ‘~씨‘ 같은 이름을 불러주면 어떨까. 낯선 이에게는 이름을 모르니 ’ 저기요 ‘ ’저 실례지만 ‘ 같은 말처럼 다가갈 수 있는 단어들은 다양하게 존재한다. 어느새 ‘내 이름’ 보다 ‘~엄마’ ‘아줌마’로 더 많이 불리는 자, 서글픈 푸념을 하며 몸부림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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