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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u Oct 04. 2024

육아는 경력이 될 수 없나요?

인생을 송두리째 갈아 넣었거든요.


출산율이 줄어들면서 그 많던 어린이 집이 하나씩 점점 사라져 간다. 오전 시간 선생님과 친구들의 손을 잡고 삼삼오오 산책을 나오던 귀여운 아가들이 동네에서 사라져서 보이지 않는다. 재잘재잘되며 뒤뚱거리며 걸어 다니던 작고 사랑스러운 아가들이.




어린이집부터 유치원까지 아이들 입학을 위해 밤새 줄을 서기도 하고 추첨을 뽑기 위해 해도 뜨기 전에 유치원으로 달려가야 했다. 인기 많은 어린이집과 유치원은 몇 년씩 대기를 기다려야 했던 예전의 모습은 사라졌다. 아이들이 점차적으로 줄어들면서 기관들마저 줄어들다 사라지고 있다.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데, 마을은커녕 엄마와 조부모의 시간과 노동력, 금전들이 모두 투자되어도 쉽지 않은 게 요즘 아이를 키우는 현실이다. 일부러 일을 그만두고 아이를 키우는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아이가 오래 아프거나 도저히 맡길 수 없어 아이를 데리고 출근할 수 없는 경우 선택적 경력단절이 될 수밖에 없다. 남편은 업무로 잦은 해외출장을 다니고 조부모님이 맡아놓고 키워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첫 아이는 툭하면 열이 나고 고열과 폐렴, 장염을 번갈아 앓았고 수시로 응급실을 다니며 입원 치료를 해야 하고 일주일의 반은 병원을 들락거려야 하는 상황에서 내 경력을 놓지 못해 아이를 두고 나갈 수도 없었다. 아픈 아이를 보육기관에 맡기고 막무가내로 출근을 강행할 수는 없는 일이었고 엄마 외에는 울면서 거부하는 어린 생명을 내가 품어 책임지고 싶었다.



오롯이 대부분의 육아를 엄마가 맡다 보니 ‘사람 자체’의 존재는 무의미 지고 ‘엄마’라는 존재만 남았다. 아이가 커나가면서 스스로 해내는 일이 많아지는 ‘인간’으로 성장하고 있을 즈음 엄마의 경력 단절은 쉽게 10년을 넘겨버렸다. 이미 오랜 시간 단절 된 사회생활에 선뜻 나가기 어려운 상황에 놓인다는 뜻이다. 경력단절을 벗어나기 위해 다양한 아르바이트도 도전하고 자격증 공부 등을 찾아보며 도전하는 엄마들도 있지만 이 또한 쉽지 않다고 한다. 아이들을 돌보면서 집안일을 병행하고 시간을 쪼개고 쪼개야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나 공부는 현실이 녹록지 않다. 아이들이 손이 많이 가는 어린 시절에는 기관에 가는 오전의 잠시시간만 활용이 가능하나 이마저도 어릴수록 수시로 아픈 아이들 덕에 중단되기 일쑤다. 아이들이 초등 고학년 이상 넘어가며  스스로 할 수 있는 상황도 많아지고 손이 덜 가는 대신 이미 엄마들은 중년을 넘어 할 수 있는 일이나 지원 자격의 범위가 매우 심각히 좁아지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모르는 아이가 와서 말을 걸거나 자기 이야기를 마구 해대는 것도 듣기 불편했다. 신발을 신고 의자에 올라가고 바닥에 드러누워 떼를 쓰고 울거나 소리 지르기 일쑤고 뛰어다니는 게 일상인 아이들은 멀리서 보기만 해도 지치고 힘들었다. 나와는 반대로 아이들을 너무 좋아하는 동생은 동네 아가들까지 도맡아 귀여워할 정도로 좋아했고 그걸 보고 있으면 신기하기까지 했었다.



아이들에 대한 생각이 바뀌는 상황에 직면했으니 중학교 때 활동했던 ‘RCY'라는 단체에서 한 달에 한 번씩 가는 영아원 봉사 때문이었다. 목동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는데 노량진에 위치한 영아원에 한 달에 한 번씩 버스를 타고 봉사활동을 갔었다. 영아원은 고아원을 가기 이전에 신생아부터 그야말로 3~4살 어린 영아들이 머무르는 곳이다. 너무 작고 여린 신생아들은 대학생 이상 어른들이 봉사를 할 수 있었고 중학생이었던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어린아이들과 대화하고 놀아주고 간식을 먹이는 일이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신나게 친구들과 버스를 타고 선생님을 따라 언덕을 올라간 곳에서 이런 곳이 있다니 놀랐던 기억이 있다.



너무 작고 귀여운 아이들은 이미 그 어린 나이에 부모가 없다는 것과 주 양육자가 없아 단체생활을 한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벽을 따라 일렬로 죽 등을 대고 앉아 봉사 오는 사람들을 기다렸고 ‘이리 와 아가들’이라는 소리에 반가워하며 품에 안겨 꼬물꼬물 말도 하고 오물오물 간식도 먹으며 여느 아이들처럼 잘 놀다가도 “이제 언니들 갈 시간이야”라는 소리에 학습이 된 기계처럼 바로 품에서 떨어져 나와 다시 벽에 등을 대고 앉아 물끄러미 이제 돌아갈 우리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갈 때마다 그 모습이 너무 마음이 아팠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부모에게 나름의 사정이 있었겠지만 저렇게도 어린 나이부터 상처로 가득할 수밖에 없는 아이들을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했었다. 지금도 마음 깊은 곳에 그 마음들이 남아있어 커피 먹는 돈 나에게 쓸 돈을 아껴 매달 부모가 없이 아이들이 머무는 곳에 기부를 멈추지 못하는 이유다.






성인이 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결혼을 하며 이 사람과 꼭 닮은 아이가 있었으면 바랬고 오랜 소망 끝에 귀하게 얻어진 아이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임신과 출산이 너무 힘들었음에도 육아는 상상 이상이었다. 임신이 되지 않아 병원을 다니며 각종 검사를 하고 좋다는 음식을 먹어가면서 매달 절망하던 날들이 길어질 때 엄마는 “지금 임신이 제일 힘든 것 같지만 출산은 더 힘들고 육아는 상상 이상이란다. 지금 순간을 너무 힘들어하지 말고 마음을 단단히 먹으렴” 임신만 하면 모든 일들이 일사천리일 것 같던 그때는 귀에 들어오지 않던 그 말이 아이를 키우며 수천수만 번을 매일 되뇌게 만들었다.



임신부터 10킬로 이상 몸무게가 줄어들며 낳기 2시간 전까지 입덧을 하느라 먹지 못하는 건 물론이요 냄새조차 맡을 수 없고 잠도 이루기 어려웠던 10달을 채워 춤을 추며 순식간에 세상밖으로 나온 아이덕에 회복은 더뎌 앉기도 힘들었고 수유도 잘 안되어 분유를 혼합하며 완모를 하지 못하는 죄책감을 가져야만 했다. 태어나면서부터 맞아야 하는 각종 예방접종마다 후유증 고열에 시달리는 2.5킬로 작은 신생아를 안고 하루종일을 버텨야 했다. 신생아가 한참을 조금 먹고 금방 토하고 밤새 잠을 자지 않는 그 모든 순간들을 어디서고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 대해 어쩜 이렇게 무지했는지 허공을 향해 수없이 원망했다. 일반적으로 ‘아가’라는 존재는 배가 부르거나 기저귀를 갈아주면 빵실빵실 미소를 보내다 스르륵 잠이 드는 그런 아이가 아닌가? 내게 그런 아이는 왜 허락되지 않는 건지 밤새 초롱초롱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고 품에 안겨있으려는 아이를 바라보며 ‘어머니의 마음’을 입이 닳도록 불렀다.


어머니의 마음

낳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를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아이들이 태어나면 수면교육, 다양한 식사 교육부터 기간과 학습, 독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정보를 찾고 얻고 실행해야 한다. 혼자서는 다 알 수 없기에 카페 정보나 포털사이트 검색으로, 주변 지인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 솔깃 하지만 육아만큼은 내 주관대로 하고 싶었다. 너무 오래 아픈 아이 덕에 복귀할 타이밍을 놓쳐버렸고 정신없이 바쁜 남편은 육아를 거의 도와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왕 내게 주어진 소중한 아이가 맑고 밝은 성품으로 누구나 좋아하는 사랑스러운 아이로 자라기를 바랐다. 눈을 뜨면 오전에는 클래식을 틀어주며 하루를 시작했고 책을 읽어주며 아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일까 항상 관찰했다.



아이들이 다 그렇듯 크고 작은 사고도 일어나고 아프고 부러지고 깨지면서 잘 자라났다.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고 자신의 역할을 조금씩 찾아가는 ‘사람’으로 잘 성장하고 있는데 정작 엄마인 나는 나이만 들어가고 몸에는 병이 한 둘 씩 늘어나며 일자리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나이가 연로해진 부모님들이 돌아가면서 아프시다 보니 병원에 다니시고 수술하시는 일들이 계속 생기다 보니 나의 경력은 임신-출산-아이들 육아와 부모님의 무사한 하루하루를 위해 일주일이 모자랄 지경에 이르렀다. 아이들이 잘 커가는 모습에 뿌듯해하는 걸 본 내게 친정엄마는 “네가 나이 들어가는 건 생각 못하니? 대학원까지 나와서 아이들만 키우고 있기에 네가 너무 아깝다.” 나는 내 자식이 자라는 걸 기뻐하고 있을 때 엄마는 손주들을 사랑하는 마음도 크지만 자신의 딸의 아이들을 키우며 나이 들어감을 항상 안타까워하셨다.


 

첫 아이를 낳고는 원래 일하던 회사에서도 복귀를 원했고, 대기업에 다니던 후배들까지 입사를 권유했지만 경력 단절의 공백이 길어지며 모든 기회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당장이라도 일을 구하고 싶은 마음에 구직 관련 정보를 살펴본 적이 있는데 40대가 넘어가거나 경력 단절이 길어지면 구인광고 조건에 부적합한 사람이었다. 회사입장에서는 지속적으로 일을 해나갈 적절한 직원이 필요하므로 꼭 필요한 인력을 뽑으려는 마음 백번 이해하면서도 사회에 더 이상 내 자리가 없는데 내 인생 10년은 어디로 통째 날아간 기분이 들어 서글퍼지곤 했다. 사회에 나가 업무를 하지 않았어도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고 매일을 전쟁하듯이 열심히 살아냈는데 말이다.





딩크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임신 출산 육아가로 자신의 희생보다 아이가 없이 얻어지는 자유와 개인적인 삶에 더 집중하려는 생각이라고 한다.

혹자는 본인이 원해서 낳은 아이를 키우면서 투정 부리지 말랐지만 모두 본인이 원해서 결정한 일에 힘들고 어렵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는 경우는 없다. 엄마가 되어보면 사랑스러운 아이로 인한 행복도 있지만 반면에 본인의 의지로만 이루고픈 나 자신만의 목표나 열망이 남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변화된 사회 속에서  남편과 아이만 바라보며 평생을 살아가던 예전 엄마들과는 달리 자신의 꿈도 미래도 계속해서 만들어가고 싶은 소망을 발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엄마들이 늘고 있다. 마치 백조와 같이 우아한 자태로 열정의 발차기를 숨기면서 유영하듯.


너무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내 아이를 잘 키워내느라 고생한 엄마들에게 경력단절이란 말 대신 육아경력이라 이야기해 준다면 좋겠다 싶다. 오죽 아이 키우는 일이 힘들면 아이를 키우느니 밭일을 하겠다는 옛말이 있다고 시어머니께서는 말씀해 주시고 매번 격려와 위안을 주시곤 하셨다. 모든 이들이 하루하루 살아내느라 힘들겠지만 아이를 위해 나를 잃어버린 채 하루하루 살아내는 엄마들에게도 고생했다는 위로를 함께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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