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초마다 아이들이 번갈아 부르는 것 같은데 본인들은 별로 안 불렀고 지금 막 불렀다고 한다. 참을 인자를 새겨가며 친절한 말투로 응대를 하다하다 한계에 다다르는 순간이 온다. “엄마 그만 불러! 귀에서 피나겠네!” 엄마는 화가 슬슬 올라오려 하지만 아이들은 전혀 아랑곳 않는다. 빙글빙글 웃으면 대답을 하는 아이들. “마미~ 마마~ 마더~ 어머니~ 저기요~?” 요놈들이 이젠 좀 컸다고 엄마의 고함이나 화조차 대수로워하지 않게 되었나 보다.
툭하면 고열이 나고 열의 끄트머리에 설사를 하며 이유 없는 구토를 일삼는 신생아 덕에 아이를 케어하는 ‘엄마’의 기본적인 역할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인간의 기본적인 식욕과 수면욕구를 참아야 함은 물론 화장실조차 갈 수 없게 만들었다. 아기띠도 싫다 유모차도 싫다 그저 몸에 달라붙어있어야 하는 작고 작은 생명. 엄마 외에 아빠도 할머니도 그 누구도 허락하지 않고 오직 엄마 몸에만 24시간 붙어있어야 하는 신생아를 키워야 했다. 하필 그 시기는 남편은 평생에 가장 바쁘고 일이 많던 시기라 혼자 고립되어 하루 4시간만 자면서 엄마 몸에 붙어사는 신생아는 끊임없이 아팠고 덕분에 처절했던 ‘독박육아’ 생활로 인해 몸과 마음이 피폐해져 갔다. 그렇다고 귀하고 어렵게 겨우 얻은 소중한 생명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이 변하지는 않았다. 다른 모든 걸 다 포기하고서라도 아이를 먹이고 재우고 입히고 병간호를 하며 호기심을 채워주는 그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혼자 초단위로 고군분투를 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렇게 큰 아이의 건강이 좋아질 때쯤 둘째가 태어났고 다시 인생은 송두리째 끝을 모르는 육아의 긴 터널로 깊이 들어가고 있었다.
어느 정도 사람을 키워줬으면 이제 알아서 할 때도 되었건만 뭘 할 때마다 부르는 “엄마!” 안 부르면 일이 진행이 안 되는 건가? 심지어 묻지 않아도 될 것까지 물어본다. “엄마! 화장실 갔다 와도 돼요?” “엄마! 물 좀 먹고 와도 돼?” 이쯤 되면 슬슬 짜증이 난다. “너 그걸 왜 물어봐? 내가 하지 말라면 안 할 거야?” 그러자 아이는 씩 웃으면 한마디 하고 지나간다. “아니, 그냥 물어봤어” 이놈들이 날 놀리는 건가? 수다가 더 필요한 건가? 헷갈릴 지경이다.
아이들의 요구사항은 원래 이렇게 끊임이 없는 걸까? 하나부터 열까지 다 물어보는 걸 듣고 있자면 스스로 할 수 없게 키웠나 자책을 해보지만 또 각자 하는 걸 보면 학교 생활도 자기 공부나 생활도 스스로 알아서 잘하는 편이다. 주변 엄마들에게 물어봐도 다른 집 애들도 다 그렇게 불러댄다고 한다. 자랄수록 본인의 자아도 커지고 슬슬 사춘기 정점으로 들어가는 중학생조차도 스스로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면서 꼭 엄마를 불러 물어본다. 진짜 이해가 안 돼서 진지하게 붙잡고 물어봤다. “엄마 말 안 들을 거면서 왜 자꾸 물어봐?” “알았어 엄마 시키는 대로 하면 되잖아!” 이쯤 되면 싸우자는 건가 싶기도 하다.
어릴 때는 “엄마 내가”를 달고 살아서 스스로 하게 지켜보느라 힘들었건만 이제는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꺼면서도 한 번씩 말을 걸쳐보고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지친다. 그나마 막내는 어려서 그런지 엄마 말을 듣는 ’척‘이라도 하는데 중학생은 귓등으로 듣는 둥 마는 둥 잔소리라도 시작되면 표정부터 달라진다. 투덜대는 말투와 반항적인 태도까지 대화조차 하기 싫어지는 상황을 만들고서는 본인의 요구사항이 생기면 웃으며 다정히 부른다. “엄마~“
어느 동영상에서 교육 전문가 분인가가 “엄마 부르지 마!” 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직접 겪어본 엄마는 그런 말 하기 힘든 상황에 수 없이 목도한다. 엄마도 사람인데 아이들과 즐겁게 대화하고 이야기 나누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때와 장소에 상관없이 필요에 의해 하루에도 수도 없이 불러대는 ‘엄마! 엄마! 엄마!’ 매주, 매년이 쌓여서 10년이 넘어가니 매번 부드럽게 받아주기 쉽지 않다. 그래도 최대한 공감해 주고 들어가려 노력을 하지만 가끔은 벽하고 이야기하는 게 낫다 싶을 때가 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기본적인 요구사항을 주로 어필했다. 엄마의 도움이 필요하거나 엄마가 같이 해주길 원하는 상황들이 대부분이다. 귀찮을 때도 있지만 귀엽기도 하고 표현하는 게 기특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고학년이 되고 중학생이 되면서 엄마에게 바라는 요구사항은 정말 ‘내가 필요한 걸 해달라’는 요구사항 자체다. 친구들과 사 먹을 돈이 필요하다, 게임 시간을 늘려달라, 간식이 더 필요하다, 친구들과 놀러 가게 허락을 해달라, 학용품이나 물건이 필요하니까 구입해놔 달라. 빚쟁이도 이런 빚쟁이가 없다. 어쩜 이렇게 요구사항이 끊임없이 요술항아리처럼 계속 튀어나오는지 신기할 지경이다.
응당 부모자식 사이니까 요구도 응석도 받아줄 수 있다. 기본적으로 들어줘야 할 의무도 있기에 무던히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보니 아이들도 엄마는 약속을 꼭 지키는 사람이라는 믿음도 굳건하게 가지고 있다. 가끔은 ‘엄마’를 부르고 대답을 하면 ‘그냥’을 날리고 쿨하게 돌아서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다 보면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작고 어린아이를 벗어나 엄마보다 몸도 커지고 어른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남자 아이라 나름의 애정표현인가 싶기도 하다. 엄마랑 함께하는 시간을 좋아하는 아이들이다 보니 엄마보다는 친구가 좋을 나이라 친구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집에 돌아와 엄마와 같이 있는 공간에서 엄마의 관심을 받고 엄마와 할 말은 없지만 말 한마디 걸어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품 안에 자식이라는 말이 있다. 어릴 때는 아이들을 키우느라 몸도 힘들고 먹고 자는 게 어렵다 보니 사람으로서의 삶이 맞나 싶어 진다. 아이들이 좀 더 자라면 아플까 다칠까 걱정하지만 어느새 부모보다 자라 버린 아이는 점점 몸도 마음도 멀어진다. 학교 학원 친구로 인해 자는 가족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짧아지고 대화도 점점 줄어든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이가 없으면 허전하고 있으면 불편해진다. 내 아이기에 멀어지려는 아이와 조금 더 가깝게 지내고 싶어지는 나이가 되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말이나 휴일에 시도 때도 없이 번갈아 불러대면 분노게이지는 수시로 작동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