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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험주의자 Mar 29. 2021

퇴근길, 오늘 아무 일도 없어서
무료했다면

세상의 어둠으로 삶을 돌아보고 싶다면 ① 폴란드의 오슈비엥침 수용소


독일어명 아우슈비츠로 더 잘 알려진 오슈비엥침 수용소, 이 곳은 책 ‘안네의 일기’, 영화 ‘쉰들러 리스트’, ‘피아니스트’, ‘인생의 아름다워’와 같은 작품을 접한 뒤 오래전부터 방문하고 싶었던 곳이다. 2007년에는 독일의 ‘다하우’, 2010년에는 캄보디아의 ‘뚜어슬랭’을 방문하여 비슷한 감정을 느껴보았지만, 무려 150만 명의 사람들이 허무하게 생을 마감한 이 최대 규모의 수용소에서는 어떤 생각이 들게 될까, 더욱 엄숙한 마음을 갖고 방문하기로 했다. 



폴란드 남부 도시 ‘크라쿠푸’에서 70km 정도 떨어진 그곳은 오전 8시 반에 도착했음에도 이미 많은 관람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정문 위에 걸린 유명한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Arbeit macht frei’,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모순 덩어리의 말. 전시실은 여성들의 수용소였던 4~11 블록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수용소에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나치가 ‘불량 민족’이라고 규정한 집시, 정치범과 동성애자들도 수감되었는데, 이들은 유럽 각지에서 기차를 타고 온 뒤 이 수용소 앞에 내리자마자 즉시 죽임을 당할 것인지 노동을 할 것인지 분류되었다고 한다. 노동 적합 계층으로 분류된 이들은 전체의 20~25%였다고 하니 나머지 대다수의 사람들은 도착하자마자 가스실에서 허무하게 생을 마감했던 것이다.



4블록 전시실에는 2톤에 달하는 여성 수감자들의 머리카락이 있었는데, 한 여성 관람객이 이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나치는 수감자들에게서 자른 이 머리카락을 산업 원료로 사용하고 물건은 갈취하여 현금화했다고 한다. 악랄할 뿐만 아니라 참으로 치졸한 행위였다. 전시관 유리를 가득 채운 거대한 신발과 안경 더미를 통해 희생자들의 엄청난 규모를 가늠할 수 있었고, 열악한 숙소와 위생 시설을 보면서 그들의 절망감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실제 총살을 집행했던 장소와 죽음의 벽 앞에 섰을 때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다른 수감자들이 볼 수 없도록 양쪽 블록의 창문을 나무판자 등으로 막아 놓고, 내가 지금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바로 이 곳에서 무자비하게 총살을 했다는 것이다. 무거운 공기가 가슴을 짓눌렀다. ‘만약 이런 일이 나와 우리 가족에게 일어났다면…’ 상상만 해도 몸서리가 쳐졌다. 다음 날 ‘갈리시아 유대인 박물관’에서 관련 전시를 보던 중 가스실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모자의 대화를 읽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엄마, 우리가 죽을 때 많이 아픈가요?” “사랑하는 아가야, 아프지 않을 거야. 그건 1분도 안 걸릴 테니”



약 세 시간 동안 오슈비엥침을 관람한 후 10분 정도 셔틀버스를 타고, 제2 수용소인 브레진카(독일어로 바르케나우)로 갔다. 오슈비엥침에서 수용 인원을 감당하지 못하자 그보다 5배 정도 더 크게 지은 이 수용소는, 본래 10만 명을 수용할 계획이었으나 실제로는 그 두 배인 20만 명을 수용했다고 한다. 현재는 흔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지만 광활한 부지를 통해 수용소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입구에서 약 10분 정도 걸어가면 희생자의 추모비가 나오고, 가스실과 화장장 잔해와 재로 뒤덮여 회색으로 변해 버린 연못을 볼 수 있다.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이 고요한 평원에서 그토록 잔혹한 일들이 벌어졌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소나기가 내리고 천둥 번개라도 쳐야 할 것 같은데, 전 날보다도 더 맑고 파란 하늘이 이상하게 느껴져 가슴이 먹먹해졌다. 



관람객들 중에는 유대교 전통 모자인 ‘키파’를 쓰고 이스라엘 국기를 어깨에 걸친 채 선생님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학생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그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조상을 추모하는 마음일지 가해자에 대한 분노 일지 궁금해졌다. 그런데 다음 날 ‘쉰들러 박물관’에서 유대인 격리 지역인 ‘게토’ 사진을 보면서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게토 건설 장면을 보며 스친 장면이 바로 이스라엘에서 본 ‘팔레스타인 분리 장벽’이었으니까. 도대체 그 분리 장벽이 이 게토와 다른 게 무엇일까?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어 자신들이 당한 일을 똑같이 재현하고 있는 모습에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나 혼란스러운 순간이었다. 



당시 희생당한 많은 이들을 추모하는 마음과 함께, 오슈비엥침의 교훈이 분리 장벽을 쌓는 결과를 낳지 않길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내가 전쟁의 한 복판에서 유독 가스가 아닌 아무 일도 없이 평화의 공기를 마시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하게 되었다. 


☆ 2017년 9월에 방문 

★ 1940~1945년에 사건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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