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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험주의자 Oct 09. 2021

퇴근길, 이번 휴가는
진짜 혼자서 쉬고 싶다면

나만의 비밀스러운 도시를 찾고 있다면 ② 마케도니아의 오흐리드


평소 여행 좀 다녀본 사람들이 “조금 특별한 곳 없어요?”라고 물을 때 추천하는 곳은 남동 유럽에 위치한 ‘발칸’의 국가들이다. 발칸(Balkan)의 어원이 터키어 ‘산악 지대’에서 비롯된 것처럼 어디에 시선을 두든지 아름다운 초록의 자연을 볼 수 있는 곳, 유럽 여느 도시와 같이 고풍스러운 건축물이 펼쳐져 있으면서도 물가는 동남아 국가를 여행하는 듯 낮은 곳, 무뚝뚝해 보이지만 사실은 수줍은 현지인들이 이방인에게 순박한 미소를 보내주는 곳이다. 무엇보다 발칸의 가장 큰 매력을 꼽자면 바로 ‘한적함’이다. 아직은 다른 유럽의 관광지들만큼 유명하지 않아 가끔은 나 혼자 전세 낸 듯 여행할 수 있었고, 동양인과 세계 어느 나라를 가든 존재했던 한국인 관광객도 드물어 ‘보기 드문 동양인 관광객’이라는 메리트도 누릴 수 있었다. 



보스니아 사라예보의 구시가지, 불가리아의 소피아와 세븐레이크,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의 야경 등, 발칸 국가와 도시들은 모두 매력적이었기에 한 군데만 꼽는 건 어려웠다. 그러나 발칸의 한적함과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면 역시 마케도니아의 ‘오흐리드 호수’가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평소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어 휴가만큼은 혼자 조용히 보내고 싶은 사람이라면 더욱 좋아할 만한 장소다.



장기 여행을 떠나기 불과 몇 개월 전, 묵직한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는 사무실 의자에 앉아 잠시 눈을 감고 나만의 멍스팟을 상상한 적이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호수를 바라보면서 그냥 멍 때리고 싶다….’ 바로 그 순간 상상했던 풍경이 눈앞의 오흐리드 호수에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아담한 호수가 아니라 눈과 가슴을 탁 트이게 하는 바다처럼 광활한 호수 말이다. 약 5백만 년 전 지각 변동에 의해 생긴 오흐리드 호수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되고 수심이 깊다고 한다. 해발 고도 약 700 미터에 위치해 있어 여름에도 서늘하고 공기가 깨끗하여 깊게 숨을 쉬면 방금 샤워를 마친 듯 몸과 마음이 상쾌해졌다. 매일 이런 풍경을 보고 공기를 마신다면 마음까지 자연을 닮아 순수해 질 것 같았다. 



근처의 ‘세인트 나움 수도원’과 ‘물 박물관’을 돌아보기 위해 보트 투어에 참가했다. 눈부신 햇살이 수면 위로 수많은 보석을 만들어낸 이른 아침, 열 명 정도의 관광객을 태운 흰색 보트는 깊고 푸른 호수 한가운데로 빠져들 것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이런 풍경은 매일 보아도 새롭다는 듯 건장한 체격의 보트 캡틴이 웃으며 말했다. 마케도니아가 돈이 많은 부자는 아닐지라도 자연은 엄청난 부자지” 나도 캡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새파란 하늘과 에메랄드 빛 호수 사이를 빼곡한 나무와 풀이 감싸고 있어 어디를 보아도 날 것 그대로의 자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이 경이로운 자연 속에 숨 쉬고 있다는 자체에서 순수하고 궁극적인 행복을 느낄 수 있었던 순간! 



오흐리드에서의 모든 시간이 힐링 타임이었지만, 호숫가 벤치에 앉아 책을 읽었던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한창 책에 빠져들었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호수를 바라보면, 현실이 아닌 듯 찬란한 물결이 펼쳐져 있어 마치 호수 한가운데에 붕붕 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잠시 눈을 감고 찰랑찰랑 물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졌고, 다시 책으로 천천히 시선을 옮기면 종이 속 활자들이 빛을 받아 내용마저 눈부신 해피엔딩으로 바뀐 것 같았다. 



다만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바로 이 지역에 크고 작은 지진이 잦다는 것이다. 2017년 7월 3일 저녁, 샤워를 하는 중 지진이 났는데 처음 겪어본 ‘수직 방향 지진’은 마치 샤워 부스 전체를 쿵 들었다 놓은 것처럼 오싹한 느낌이 들게 했다. 가장 강했던 순간에는 진도 5도까지 되었다는데 현지인들은 일본이나 대만의 지진처럼 흔한 일이라고 하고, 한 여자는 지진이 나면 아름다운 상태로 발견되기 위하여 메이크업을 가장 먼저 하겠다고 농담하는 등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듯했다. 나는 소중한 몸을 지켜 여행을 계속하고 싶었기에 일정을 하루 앞당겨 떠나기로 했지만, 힐링의 결정체였던 저 푸른 호수를 등지는 것이 아쉬워 두고두고 뒤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 2017년 7월에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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