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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험주의자 Sep 11. 2021

퇴근길, 풍경보다 사람이
떠오르는 여행을 하고 싶다면

나만의 비밀스러운 도시를 찾고 있다면 ① 북 키프로스 섬


벌써 13년 전의 추억, 2008년 터키에서 교환학생으로 체류할 때 1년간의 학생 비자를 받는 대신 3개월에 한 번씩 주변 국가를 여행하며 90일 무비자를 갱신하는 방법을 택했다. 덕분에 매 계절마다 ‘강제 여행의 의무’를 기꺼이 수행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그 해 여름에는 50일간의 중동 여행을 시작하며 현재는 여행 금지국으로 갈 수 없는 ‘시리아’를 다녀왔고, 가을에는 당시만 해도 미지의 나라였던 ‘조지아’를 여행했다. 그리고 눈부신 지중해의 봄 날을 만나러 떠났던 곳은 터키의 입장에서 자국인 듯 자국 아닌 ‘북 키프로스’이자 ‘사이프러스’ 섬이었다. 



아리송한 이 섬 북부의 ‘북 키프로스’는 터키의 영향력 하에 있고, 남부의 ‘남 사이프러스’는 공식 ‘사이프러스 공화국’으로서 그리스의 영향을 받고 있다. 국제적으로 터키의 북 키프로스는 인정되지 않으며, 이전 독일의 베를린처럼 수도인 ‘레프코샤/니코시아’가 그린 라인으로 나뉘어 양측에 UN 평화유지군이 주둔하고 있다. 이토록 복잡 해 보이는 분단의 장소지만 실제로 치안은 문제가 없으니, 달리 생각하면 터키와 그리스의 문화를 한 번에 만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고도 할 수 있다. 특히 남부의 ‘파포스’와 ‘파라솔’ 등 해안 도시는 당시에도 이미 유럽인들에게 유명한 휴양지였다. 



20대 초반이었던 그때까지 외국의 휴양지 해변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던 내게, 북 키프로스의 해안 도시 ‘기르네’의 첫인상은 한 마디로 꿈속에서 상상하던 천국의 모습이었다. 두 볼을 간지럽히는 따스한 바람에는 신선한 바다 내음과 꽃 향기가 뒤섞여 묻어났고, 지중해의 잉크 빛 파도가 새하얗게 부서지는 풍경을 보고 있으면 저 멀리서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떠밀려 올 것 같았다. 남국의 봄이었기에 더 화려하게 만개한 꽃 향기를 맡으며 햇살 아래를 걸으면 절로 미소가 번졌고 영화 속 한 장면에 들어온 듯한 기분을 느꼈다. 체코의 화가 ‘알폰스 무하’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파스텔 톤의 따스한 기운이 이 섬의 공기를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어, 그 품에 스르르 안겨 나른한 낮잠을 자고 싶었다. 



무엇보다 이곳이 특별한 장소가 된 이유는 현지에서 처음 만난 친구들 덕분이었다. 인연의 시작은 터키 앙카라에서 북 키프로스로 가는 비행기 안. 창 밖을 보고 싶어 하는 듯 보이는 옆 좌석 할아버지의 손녀에게 창가 좌석을 내어주었는데, 할아버지께서 고마운 마음에 얼굴을 기억하셨던 것 같다. 대중교통이 발달하지 않아 공항에서 시내까지 가기 위해 혼자 비싼 택시를 타야 하나 고민하던 중, 그들을 픽업 나온 할아버지의 딸이 차를 태워 주고 하루 밤 잠자리를 제공해 줄 친구까지 소개해 준 것이다.  



그렇게 얼떨결에 한밤중 만나게 된 ‘이리나’와 ‘디아나’는 아무런 계획 없이 처음 만났음에도 오래된 친구처럼 환영하며 자신의 침대를 내어 주었다. 그들이 사는 방갈로는 바다 바로 옆에 위치 해 있어 파도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잘 수 있었고, 다음 날 아침 바닷바람을 맞으며 신선한 샐러드로 아침을 먹으니 자연의 일부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싱싱한 야채와 과일은 기운을 나게 해” 채식주의자인 이리나가 만든 샐러드는 정말 맛있었기에 나 역시 채식주의자가 되어볼까 아주 잠깐 동안 고민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다른 친구들을 만나 ‘기르네 성’과 ‘벨라파이스 수도원’ 같은 관광지를 돌아보고 수도 ‘레프코샤’에도 다녀오고, 그들이 공부하는 대학 캠퍼스에 구경 갔다가 휴일에는 학교 소풍을 따라가기도 하면서 4박 5일 내내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후 많은 휴양지를 다녀본 지금 시점에서도 그때만큼 황홀하게 아름답다고 느껴진 장소는 없었다. ‘처음’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여행 중 낯선 땅에서 낯선 이방인을 가족처럼 품어주었던 그곳 친구들과의 추억이 함께 떠올라서 그런 것 같다. 7개 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며 나에게 다양한 친구들을 소개해준 마당발 키르기스스탄인 ‘나르기스’, 자신의 엄마가 한국에서 일하고 있어 나를 향한 눈빛에 그리움을 담고 있었던, 내가 만든 정체불명 볶음밥을 맛있게 먹어준 키르기스스탄인 ‘디아나’, 조용히 눈을 감고 바람을 느끼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 여행 내내 나를 친언니처럼 챙겨준 우크라이나인 ‘이리나’, 바쁜 중간고사 기간이었음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어 따끈한 터키식 환대를 보여준 터키인 ‘엘리프’와 ‘루키예’, 그 밖에 잠시었더라도 웃으며 인사를 나눴던 그들의 수많은 친구들을 모두 기억하면서,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풍경보다 사람이 먼저 떠오르게 된 여행을 만들어 주어 다시 한번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 2008년 4월에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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