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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통로이현아 Mar 09. 2018

그림책, 온전한 나를 발견하는 통로

[학교도서관 저널] 2018-3월 특집 책쓰기 활동

학교도서관 저널 3월호에 쓴 글입니다.          

                                                                       


                                              

그림책, 온전한 나를 발견하는 통로


  아이들은 교실에서 12년간의 학창시절을 보낸다. 교실에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표현하는 시간은 과연 얼마나 될까? 나 역시 학창시절 12년간 많은 것을 쓰고 그렸다. 대개 답은 정해져있었고 나는 그 맥을 빠르고 정확하게 짚어내어 충실히 따르는 것을 미덕으로 알았다. 제시된 방향에 잘 부합하는 글을 써서 상도 많이 받았다. 그러다 이따금 서점에서 온전한 자기 자신을 마음껏 자유롭게 펼쳐둔 책을 만나면 눈이 번쩍 뜨였다. 갈급했던 영혼의 스펀지가 신선한 물을 쭉쭉 빨아들여 비로소 촉촉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책을 밤새 부둥켜안고 읽으면서 나는 이렇게 물었다. “뭐야, 이렇게 써도 되는 거였어?” 어리둥절함과 함께 모종의 배신감을 느꼈다.
     
  내가 아이들과 그림책을 창작하는 이유는 ‘그렇게 써도 된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함이다. 한 권의 책에 온전한 자신을 드러내어놓고 마음껏 표현하는 시간을 경험하게하기 위함이다. 아이들은 성장하는 존재로서 스펀지와 같은 유연한 수용 능력을 갖추고 있다. 출렁이는 그림책의 파도 위에 아이들을 한 명의 창작자로 우뚝 세워주고 싶었다. 자신을 위한 온전한 백지가 주어질 때 아이들은 거침없이 표현하며 두려움 없이 도전한다. 그림책이라는 매체는 글과 그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하나의 서사로서 새로운 의사소통의 방식과 독특한 리듬을 창출해낸다. 모리스 샌닥은 이에 대해 ‘리듬감 넘치는 단어와 그림의 당김음’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 리듬으로 파도를 타면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마음껏 발산하게 하는 것이 성장의 시작이다.


은유거울에서부터 시작하라.

  창작의 시작은 은유적 사고를 통한 자기이해에서부터 시작한다. 내가 가진 성격이나 특징을 직접적으로 설명하기보다 사물이나 색, 혹은 음계에 빗대어 표현해보는 것이다. 우유부단한 성격을 흐느적거리는 미역으로 표현하는 아이도 있고 남을 의식하고 의견이 틀릴까봐 두려워하는 자신을 연한 살색으로 표현하는 아이도 있다. 무엇을 하든지 만족하지 못하고 부족함을 느끼는 본인을 음계에서 ‘도’로 올라가고 싶어 하는 ‘시’로 표현한 아이도 있다. 개인적 은유를 찾아내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자기 이해의 과정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는 자신만의 내러티브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며 이야기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과정이 된다.


점과 선으로부터 한 권의 그림책을 끌어내라.

  그림책 창작에 있어 교사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그림을 못 그리는 아이도 ‘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드로잉에 대한 자신감 부족을 어떻게 해결할까? 먼저 점과 선으로만 한 권의 그림책을 끌어내는 방법을 제안한다. 점의 크기나 색, 개수, 선의 방향 등에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모두 담아 표현하는 것이다. 이는 구체적인 사물이나 장면을 그림으로 그리는 것에 비해 훨씬 부담을 줄여준다. 또 제한은 오히려 창의적인 발상을 가능하게 하는데, 제한적인 요소로 자신이 전하고 싶은 것을 표현하다보면 점과 선을 조형 언어적으로 활용하게 되기 때문이다. 선의 엉킴과 매듭을 통해 자신의 상처와 흉터를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아이가 있는가하면 색의 변화만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아이도 있다.
 


그림책의 그림, 꼭 그려야 할까?

  어린이작가 조연지는 내면에 표현하고 싶은 것은 많은 아이다. 그러나 이를 그림으로 그려내지 못해 수업 내내 움츠러들고 쩔쩔매는 모습을 보였다. 인터넷 상에 꾸준히 소설을 연재할 만큼 글을 쓰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던 그녀이지만 그림을 그리는 것에는 너무 자신감이 없었다. 그녀에게 내가 해주었던 말은 그림책의 그림을 꼭 ‘그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그림책 창작의 과정에서 지도교사로서 내가 가장 고민한 것은 바로 드로잉에 자신감이 부족한 학생들이 어떻게 하면 좀 더 쉽고 부담 없이 창작에 적극적으로 뛰어들도록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자신의 그리기 실력을 의심한다. 선생님이나 친구들이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면 곧잘 ‘망쳤다.’, ‘나는 원래 소질이 없었다.’는 말로 자신을 방어하면서 그리기에 흥미를 잃어가는 것이다.
    

 


색감과 질감이 전부인 그림책

  그러나 그림책의 그림은 꼭 ‘그려야’ 하는 것일까? 펜이나 색연필의 선으로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자신의 창작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분명히 존재한다. 어떤 구체적인 형체를 그리기지 않아도 물감의 색과 질감 그 자체로 추상적인 형태의 감정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어린이작가 조연지는 붓과 나이프와 손가락을 활용해서 물감을 찍어서 발라보고, 덕지덕지 칠해보면서 자신의 감정을 오로지 색과 질감으로만 표현했다. 자신의 어두웠던 마음이 한줄기의 빛을 얻어 점점 환하게 변하고, 여러 가지 감정들이 섞여서 아름다운 색으로 발현되어가는 과정을 그저 거친 형태의 추상적인 이미지와 색으로 표현한 것이다. 생각보다 멋진 장면이 연출되자 아이는 수업에 점점 흥미를 붙이고 자신감을 회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표현하니까 훨씬 멋있고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아요. 내면에 응어리 진 것들을 풀고 표현하기 위해서 그림을 그리는 건데, 잘 못 그리니까 오히려 스트레스만 쌓였거든요. 이렇게 색으로 자유롭게 표현하니까, 너무 속이 시원해요. 나 자신의 감정을 더욱 잘 이해하게 된 것 같아요. 그리고 항상 나를 어둡고 불행하게만 여겼는데, 내 안에 이렇게 밝은 부분이 있고 다양한 감정들이 어우러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어린이작가 조연지 [교실 속 그림책 105] 빛나는 달 (2017, 교육미술관 통로)

  



어린이작가에게 ‘자기만의 책’을 선물하는 것의 의미

  어린이작가 조연지는 내면에 표현하고 싶은 이야기를 가득 품은 아이다. 수업시간에 질문도 가장 많고 풀어내고 싶은 이야기도 많다. 그런데 학급에는 이야기를 들어줄 친구가 별로 없다.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수단으로 연지가 찾은 것은 인터넷 채팅, 그리고 그림책이다. 사이버 공간에는 자신이 업로드하는 이야기나 소설에 공감해주고 호응해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연지는 그것을 통해 위로를 받았던 경험을 그림책에 고스란히 쏟아내었다. 어린이작가에게 ‘자기만의 책’을 선물하는 것은 이러한 솔직한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온전히 귀 기울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꾸며내지 않고, 눈치 보지 않고, 자신이 가진 온도와 속도 그대로 가슴 속 이야기를 꺼내어 보이게 하는 것은 아이를 제대로 숨 쉬게 하고 성장하게 한다.
     

“부모님이나 어른들은 인터넷에서 친구를 만났다고 하면 무조건 인상부터 찌푸리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 선생님한테도 이 이야기를 털어놓을까 말까 고민했어요. 또 나를 나쁘게 보지 않을까 해서요. 그런데 저는 인터넷 채팅을 통해서 정말 위로와 용기를 얻었거든요. 제가 쓴 그림책을 통해서 사람들이 그걸 꼭 알아주었으면 좋겠어요.”

어린이작가 조연지 [교실 속 그림책 105] 빛나는 달 (2017, 교육미술관 통로)


덮으면서 다시 시작하는 이야기

  어린이작가들이 쓰고 그린 것에서 나는 생동하는 빛을 발견했다. 그것은 새벽공기와 같은 청아함을 느끼게 했다. 가르친 것을 배워서 알게 된 것이 아닌 저절로 샘솟아 물안개처럼 피어오른 것들. 아이들이 선사한 그것은 창작 그림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독자인 나에게 스며들었고 가슴으로 옮아갔다. 그것은 한 명의 교사이자 인간인 나의 삶에 생각지 못한 화두를 던져주었다. 덮으면서 다시 시작하게 된 것이다. 좋은 그림책이란 마지막 장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책이 던진 화두로 인해 마지막 장을 덮을 때 마음이 출렁이는 그림책. 통로의 그림책을 통해 읽는 이들의 가슴이 깨워지기를, 그래서 그림책 밖의 삶 속에서 또 하나의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기를 소망한다.
                                     





* 글을 쓴 이현아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가고 발견하는 삶을 가치롭게 여기며 교육과 예술이 지향하는 궁극의 본질도 ‘삶 속에서의 의미만들기 과정’ 과 다름없다고 믿습니다. 교실에서 의미를 발견한 날부터 아이들에게 스며흘러가는 통로의 삶을 살기로 다짐하고 배워서 남 주는 삶의 기쁨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현재 교육미술관 통로를 운영하면서 어린이작가들과 창작그림책을 만드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으며 [교실 속 그림책]이라는 총서명의 그림책 시리즈를 독립출판하고 있습니다. 예술을 사랑하는 교육자이자 연구자(A/R/Tography)의 한 사람으로서 독서교육과 미술교육의 두 맥락에서 그림책에 대한 유의미한 담론을 이끌어내며, 가치로운 교육적 역할을 실천해내기를 소망합니다.     


*홈페이지 교육미술관 통로 http://www.museum-tongro.com


*블로그 http://blog.naver.com/okas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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