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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통로이현아 Jan 15. 2018

“내가 달게 읽은 글들은 내 삶에 맛을 더했다.”

[덮으면서 다시 시작하는 그림책] 유년의 정원, 마음의 힘을 키우는 시간

삶의 여정에서 어떤 흐름이 나를 관통하는 듯 생각지 못했던 일을 만나 마음을 쏟게 될 때가 있다.

그리고 그 일을 품고 열심히 진행해 나가다 보면, 참 고마운 인연으로 한 사람을 만나게 될 때가 있다.
그림책으로 만나게 된 그런 귀한 인연 가운데 내게 [교실 속 그림책] Alice in the library를 쓰고 그린 어린이작가 김시윤과 그 어머니를 빼놓을 수 없다.

두 모녀는 [덮으면서 다시 시작하는 그림책] 스물 다섯 권에 마음을 담아 주었다.
귀한 책을 여러 사람들이 빌려서 볼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아파트 도서관에서부터 중학교, 동네 도서관, 지역 도서관, 마을 도서관 곳곳을 다니며
이 책을 기증해주고 아낌없이 사랑을 부어주었다.


남편은 2008년부터 십 년 째 내 인생의 동반자로서 내가 가지고 있는 삶의 철학과 방향성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마음을 쏟아주고 있는 한 사람이다.
작년의 인도네시아 우붓 봉사 때도, 대구에서의 강의도, 세종에서도, 뉴욕의 서점에서도,
그리고 올 여름으로 예정된 순천 행도, 또 내가 그림책을 손에 들고서 전 세계 어딜 향한다 할지라도
그 바쁜 사람이 어떻게든 시간을 만들어내어 때마다 나와 동행해 주는 것은
내가 하고 있는 일의 본질에 대해 적극 동의하고 공감하고 응원하기 때문이다.
이 일의 진정성과 가치에 대해 같은 마음으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기에, 나는 어떤 일을 진행 할 때 내 영혼의 동반자인 그가 설득되지 않고 동의하지 않으면 그 일은 하지 않는다.
그건 결코 내가 '남편 말을 잘 듣는 고분고분 류의 여성'이기 때문이 아니다.
옳다고 여겨지고 반드시 해야 되는 일이라면 끝까지 설득을 해내고 끝장을 봐야할 것이다.

그 누구보다 나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한 사람,
그 사람조차 설득되지 않고 동의하지 않는 일이라면
그 정도의 명분이라면,
나는 그런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럴 때는 가던 길을 멈추고 다시 한 번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부에서조차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지 않는 일이라면
외부를 향해 힘있게 박차고 나가며 다른 이들을 설득하고 선한 영향력을 흘려보내 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통로의 그림책 프로젝트에 있어
내게 어린이작가들과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하는 그들이 설득되지 않고 동의하지 않는 그림책이라면
외부의 그 누구도 설득할 수 없으며 선한 영향력이 흘러갈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교사라는 이름으로 아이들과 학부모 앞에 서는 것은
모든 이들의 전적인 동의와 사랑을 받기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그 중 몇이라도 온전히 나와 마음을 함께할 수 있다면...
그 중 몇이라도 내게서 흘러가는 것을 가슴으로 받아들여 준다면...
그건 정말 감사한 일이다.



하여,
내게 어린이작가 김시윤과 그 어머니가 마음을 담아준 스물 다섯 권의 그림책이
그리고 또 나와 함께한 많은 어린이작가들이 보내주는 사랑과 응원과 감사가
더없이 뜨거운 원동력이 된다.

그것이 없다면, 이 책은 죽은 것이다.
내부에서의 생명력을 보여준 이들이 있기에...
[덮으면서 다시 시작하는 그림책]은 이렇게 찬찬히, 그렇지만 힘 있게,
한 걸음씩 흘러갈 수 있다.




유년의 정원, 마음의 힘을 키우는 시간
“내가 달게 읽은 글들은 내 삶에 맛을 더했다.”

내 유년의 원풍경
우리는 종종 자문한다.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과연 무엇인가? 가장 밑바닥에서 굳은 심지처럼 나를 지탱해주는 것, 살아갈 힘이 되어주는 내 마음의 밑천, 그 원풍경은 과연 무엇인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걷는 듯 천천히』를 읽다가 ‘유년의 원풍경’을 만난 적이 있다.

책을 읽는 장소로서 제일 맘에 들었던 곳은, 겨울 동안에만 가능한 것이었지만, 눈으로 만든 집인 ‘가마쿠라’였다. 요즘 도쿄에서는 눈이 내리면 금세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지만, 그때만 해도 공터에 쌓인 눈으로 꽤 큰 가마쿠라를 만들 수 있었다. 크다고는 해도 고작 아이 한 명 들어가는 정도였지만, 그렇기 때문에 완전한 고독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도쿄에서 태어나 자란 내게 원풍경으로 불릴 만한 것이 있다면, 태풍이 지나간 뒤 쓰러진 옥수수 밭, 가마쿠라와 그 안의 정적, 그리고 이사 후 오랫동안 함께하게 된 무기질의 주택단지, 세가지다.
_ 고레에다 히로카즈, 『걷는 듯 천천히』 중에서

내게 유년의 원풍경으로 불릴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린 날의 책장이었다. 서정주 시인은 「자화상」에서 스물세 해 동안 자신을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라고 했지만 나를 키운 것은 다름 아닌 내 유년기의 방, 독서실과 도서관에서 보낸 사유와 향유의 시간이었다. 언제까지나 간직하고 싶은 나만의 책장에 들어 있는 것은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들어 몰두하는 시간에 대한 경애, 책에 대한 동경, 엉덩이 붙이고 나 자신과 씨름하는 시간의 애틋함, 종이의 촉감과 냄새가 주는 안도감이다.

앉아 있기를 좋아했던 소녀는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아침마다 집 앞에 놓인 종이 신문을 넘기며 널따란 종이의 질감을 손끝으로 느끼길 즐기고, 여행지에 가서도 도서관과 서점처럼 책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들어서서 퀘퀘한 종이 냄새를 맡으면 가슴이 뛴다. 결혼을 하고서도 여전히 소파보다는 책상 앞이 좋은 나는 서재에 들였던 커다랗고 묵직한 원목 책상을 거실로 끄집어내어 집 한가운데에다 놓고 그곳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잔뜩 쌓아놓은 책 틈에서 맞이하는 새벽의 푸른 공기, 마음껏 펼치고 끼적이며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은 여전히 내게 마음의 힘을 주는 근간이다. 내 마음 판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시간, 현재의 내 품에 자라난 것들을 심어나간 시간. 『어릴 적 그 책』에서 곽아람이 ‘내 유년의 고고학’이라는 표현을 썼던 것처럼 내 유년의 그 시간은 돌에 새긴 것과 같은 흔적으로 내 속에 깊게 남아 있는 것이다.


스탠드 불빛 아래 ‘자기만의 방’
유년기의 나는 독서실과 도서관에서의 아늑함을 사랑하는 학생이었다. 공부를 하기보다는 책으로 가득한 조용한 책 공간에서 마음껏 앉아 있기를 좋아했다. 맘에 드는 책을 고르고 빌리거나 소유하는 행위, 책을 펴놓고 앉아 나만의 시간에 빠져들었던 그 오롯한 향유의 시간, 그 고요한 시간들이 너무 좋았다. 갑갑한 수험생활 와중에 ‘답지 않은’ 책을 펼치고 앉아 있는 것은 호기심 가득한 여고생에게 작은 해방감과 두근거림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했다.

손바닥에 쏙 들어오는 작은 판형의 시집을 나만의 것인 양 펼쳐놓고 지금 내게 ‘자기만의 방’이 있다면 바로 이 스탠드 불빛 아래 가로세로 1미터가 넘지 않는 딱 이 책상만큼의 환한 공간일 것이라 생각하면 왠지 모를 희열이 느껴졌다. 그렇게 달빛이 내리쬐는 전등 아래 앉아 열일곱, 열여덟의 밤을 두근거렸다.

나에겐 독서가 있었던 것이다. 그때는 그게 나를 구원해줄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그때의 독서는 요즘처럼 터무니없는 자랑거리가 아니었다. 시간 낭비이자 학업을 망치는 일로 평판이 난 소설 읽기는 수업 시간에 금지되었다. 책을 몰래 숨어서 읽는 내 취향은 거기서 비롯했다. 소설책을 교과서로 씌워 읽고, 되도록 모든 곳에 책을 숨겨두고 읽고, 야밤에 손전등을 켜고 읽고, 체육 시간을 면제받아 읽고, 혼자서 책과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어떤 방법이든 좋았다. 이런 취미를 길러준 곳이 바로 기숙사다. 나만의 세계가 필요했는데 그게 책들의 세계였다.
_다니엘 페낙, 『학교의 슬픔』 중에서

내게 그 ‘앉아 있는’ 시간은 『수학의 정석』과 맞붙을 마음의 힘을 키우는 시간이었다. 이는 나름의 절차를 지녔고 매일 반복되는 것으로서 내게 공부하기 전 행해야 마땅한 일종의 의식과도 같은 것이었다. 내 학창 시절 ‘자기만의 방’에서의 시간, 그 시간의 시작은 꼭 박완서로부터였다. 나는 독서실 내 자리에 앉으면 먼저 사물함 가장 왼편에 꽂아둔 박완서의 책 중 한 권을 골라 뒤적이면서 밑줄쳐 둔 문장들을 펼쳐보고 책상 맡에 써서 붙이곤 했는데, 당시에는 나름 이것을 좋아하는 작가에 대한 일종의 예의와도 같은 것으로 여겼다.

성급한 봄의 예감이 고치를 박차고 날아오르기 직전의 나비처럼 내 안에서 찬란하게 그러나 불안하게 파드닥거렸다.
_ 박완서, 『그 남자네 집』 중에서

소리도 아닌 것이 냄새도 아닌 것이 불러낸 것 같은데 밖은 텅 비어 있었다. 겨우내 방 속 깊이 들어오던 햇빛이 창호지 문밖으로 밀려나면서 툇마루에서 맹렬히 꼼지락 대고 있을 뿐. 스멀스멀 살갗을 간질이던 기척은 바로 저거였구나. 봄기운이었다.
_ 박완서, 『노란집』 중에서

이런 문장을 곱씹어 읽으며 책장마다 작가가 부려놓은 언어의 아름다움과 표현의 탁월함에 마구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내가 달게 읽은 글들은 내 삶에 맛을 더했다. 이 순간들에 대해 다니엘 페낙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책의 저자와 나는 우리끼리 오롯이 머물렀다. 책들을 읽으면서 내가 교양을 쌓아가고 있었다는 것, 그 책들이 내 안에 어떤 욕구를 일깨웠고 그 욕구는 책들이 잊히더라도 살아남을 거라는 걸 나는 몰랐다.”
_ 다니엘 페낙, 『학교의 슬픔』 중에서

책상 앞에 앉은 이러한 ‘사적인 시작’은 나로 하여금 매우 특별한 나만의 것을 꺼내어 확인하고 음미한다는 일종의 자부심을 느끼게 했다. 그러고 나면 새로 산 필기구를 꺼내어 펜촉 끝으로 필감을 느끼며 이 문장들을 일기나 시나 편지로 빼곡하게 써댔다. 지금 생각하면 그저 시답지 않은 이야기투성이였지만 ‘그때의 나와 우리’에겐 나름대로 절실하고 심오한 것들이었다.

하여 학원을 끝마치고서 어둡고 고요한 독서실로 돌아와 스탠드를 탁 켜고 자리에 앉는 늦은 밤의 시간이 내겐 버거운 수험생활 그 이상의 어떤 것이 될 수 있었다. 하루 일과 중 가장 온전한 나를 꺼내어 펼쳐놓을 수 있는 고요한 시공간이 바로 스탠드 불빛 아래 나만의 작은 책상 앞이었던 것이다.

현재의 나를 있게 한, 내면의 힘을 키워준 것은 그 시절 나만의 책장에 꿋꿋이 남은 몇 권의 책들이다. 내가 곁에 두고 사랑했으며 현재까지도 내 영혼의 한 켠에 남아 빛을 발하는 이 책들은 바로 나를 말해주는 역사요, 성장기 그 자체인 것이다.

8년 차 교사가 만난 무력함, 유리 상자 속 한계
책으로부터 내면의 힘을 키울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작은 책을 손에 들고 아이들 앞에 서는 것은 종종 내게 무력감을 느끼게 했다.

아이들을 보낸 교실에서의 오후, 텅 빈 교실에 홀로 앉아 기나긴 허탈감으로 휘청거리는 시간이 있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상황에 있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이 와르르 무너질 때였다. 그렇게 한 번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면 주말 내내 그것이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고 계속 맴돌면서 생각난다. 마음이 축 쳐져서 너무 힘이 든다. 나는 무언가 근본적이고 구조적으로 아이들의 상황을 변화시켜줄 방법을 자꾸만 생각했다.

그러나 끝도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의 결론은 허탈했다. 아이들이 청소년기에 겪는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은 대부분 가정에서 시작되어야만 한다는 것으로 귀결되기 때문이었다. 교육자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아들러의 말을 빌리자면 아이들은 모두 각자 고유의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대개 가정에서 비롯된다. 인격 형성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서의 교육’은 가정에 책임이 있다. 교사에게 기대되는 역할이란 ‘좁은 의미의 교육’, 즉 교과 차원의 교육에 불과하다. 가정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으므로 그 이상을 넘어가면 관여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림책을 통해서 아이들의 마음에 다가서고자 고군분투했건만, 아이들의 실질적인 삶 속에 다가서지 못하고 유리온실 속에서 아름다운 언어와 그림을 말하고 있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혹 이보다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대책을 아이들에게 건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먼 경치를 바라보고 노래하면서 발밑의 진흙은 바라보지 않는 것 같은 죄책감과 함께 물밀 듯이 가슴으로 밀려드는 무력감이 나를 힘겹게 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그림책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작은 그림책을 손에 들고 그렇게 무력감에 휘청대던 날, 주문했던 책 꾸러미가 도착했다. 교실에서 마음의 바람이 맥없이 쑤욱 빠졌던 날 펼쳤던 책. 이수지 작가의 『이 작은 책을 펼쳐 봐』이다. 도대체 이 작은 책을 펼치는 것이 나와 아이들에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아이들의 삶은 무심한 듯 오늘도 이렇게 흘러가는데 나는 이 작은 책으로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무당벌레가 읽는 조그만 빨간 그림책으로 시작해 작아지고, 작아지고, 또 작아지던 조그만 파란 그림책을 펼치면, 성냥갑만큼 작아진 책장은 다음과 같은 말을 건넨다.
어이쿠, 이런! 거인은 조그만 책을 펼칠 수 없어. 왜냐하면……
손이 너무 크거든! 그래서 친구들이 대신 책을 펼쳐 줘.
_ 이수지, 『이 작은 책을 펼쳐 봐』 중에서


작은 책장에는 커다랗고 뭉툭한 거인의 파란 엄지손가락이 그려져 있다.
바로 어른의 커다랗고 투박한 엄지손가락이다. 아이의 마음속에 있는 책장을 넘기고 싶지만 그 큰 손으로 도무지 집어낼 수 없어 망설이고 있는 어른의 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마음이 흔들렸다. 마음이 갈급할 때면 언제나 이렇게 생각지 못한 지점에서 해답을 얻거나 주체하지 못할 감동이 밀려들 때가 있다.

그렇다. 아이들에게는 부모님의 커다란 손도 열어줄 수 없고 선생님의 두꺼운 손도 보듬어줄 수 없는 작은 책장, 오직 고사리같은 자신의 작은 손으로만 넘길 수 있는 마음의 책장이 있다. 결국 내 손으로 내 작은 책장을 넘기는 것이 성장의 시작이며 살아갈 마음의 힘을 키우는 일이다. 답이란 남에게서 얻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구하는 것이다. 남이 던져준 답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스스로 자신의 책장을 넘기는 동안 아이는 변화할 것이다. 상황이 바뀌지 않더라도 이를 바라보는 관점과 시선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해준 말이나 가르침에 의해서가 아니라 아이 스스로 넘긴 마음의 작은 책장을 통해서 말이다.




아이들의 작은 손으로만 넘길 수 있는 작은 마음의 책장
나는 그림책을 통해 아이들의 작은 손이 핀셋처럼 끄집어내는 작은 이야기들에 주목하며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 소중한 것들을 아이 손으로 직접 써나가고 그려나가도록 도우면서 또 하나의 이야기로 키워내고 있다. 나는 자신의 작은 손으로 책장을 넘기는 그 지난하고도 귀중한 과정을 아이에게서 빼앗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삶을 살아갈 ‘마음의 힘’을 스스로 키우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책장을 찬찬히 넘겨볼 수 있도록 돕는 일, 그것을 위해 나는 오늘도 영혼을 향한 한 마디의 말과 눈빛의 레이저를 끊임없이 아이들을 향해 쏜다. 그것과 주파수가 맞아 공명하는 어떤 한 아이가 자신의 세계를 꺼내어 보이고 자신을 발견하며 마음을 북돋울 수도 있다. 그러나 레이저를 쏘는 것은 할 수 있지만 마음을 돌이키는 것은 나의 영역이 아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역할을 하면 된다.

아이의 삶에 잠시 맞닿은 내가 아이들 저마다의 어떠한 어려운 상황을 개선하거나 바꾸어줄 순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평생을 길게 이어갈 한 사람의 삶 속에서 그가 앞으로 이보다 더 어려운 그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이겨내며 살아갈 ‘마음의 힘’을 지금 여기, 이 교실에서 키워줄 수는 있지 않을까. 아이스너의 말처럼 “지금 당장 꽃이 피지 않았다고 해서 지금 씨앗을 심었다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행동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씨앗을 심었다면, 누군가는 물을 주고 또 볕을 쬐여주며 누군가는 꽃을 피울 것이다. 나와 함께하는 동안 꽃을 보지 못하더라도, 작은 싹이 꿈틀거리며 올라오는 시작을 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또한 충만한 일이다.

나의 작음을 알고 내가 오를 수 있을 만큼의 발걸음을 떼는 것,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무력감에 휘청거리지 않을 수 있다. 신학자인 라인홀드 니버가 쓴 기도의 말처럼 바꾸지 못하는 일을 차분히 받아들이면서 내가 바꿀 수 있는 부분을 바꾸는 용기, 그리고 그 차이를 늘 구분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방법
어린이작가 김시윤에게 그림책 창작이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림책 안에는 하나의 세계관이 있고 여러 인물과 장소, 의미들이 담겨 있다. 그녀는 그 모든 것이 작가가 창조해낸 하나의 유일한 세상처럼 느껴진다고 말한다. 책 속에는 작가가 창조해낸 하나의 세상이 펼쳐져 있다. 그 세상에 빠져들어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시간은 나의 취향과 마음의 밑천을 만들어가는 시간이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책, 영화, 광고, 드라마 등 수많은 형태의 창작된 세계를 만나게 될 것이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 속에서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내게 맞는 책을 고를 수 있는 능력,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능력, 사방에서 나를 자극하는 것들 중, 취사선택하여 내 취향을 만들어가는 능력, 그것이 바로 삶을 가꾸어가기 위해 필요한 능력들이다. 자기만의 방에서 마음껏 뒹군 시간, 내 작은 손으로 내 마음의 책장을 넘기는 시간이 쌓일 때, 우리는 이전에 알지 못했던 자신만의 놀라운 세계를 스스로 발견하게 될 것이다.



[덮으면서 다시 시작하는 그림책] 의 구입을 문의하셨던 분들, 독자가 되어주시길 원하는 분들께 안내드릴게요.
이 책을 구입하기 원하시는 분들께 '만원의 행복'으로 책을 보내드리려 합니다.
제가 이 책 한 권을 만드는데 (소량인쇄했기에) 1만원 이상의 금액이 들어갔으므로 사실상 인쇄비용보다 적은 금액이에요.

제가 운영하고 있는 비영리 독립출판사는 교사의 자비 부담으로 운영되며 수익을 추구하지 않아요. [교실 속 그림책]이라는 총서의 창작그림책을 비매품으로 출판등록해오고 있는 것이 그 이유이고요.
이번 프로젝트로 만들어진 책으로 보다 의미있는 일을 꾸준히 이어가기 위해 다문화 어린이들에게 그림책을 만들어주는 일에 수익금을 전액 기부할 예정입니다.

총230권 한정판으로 출간한 책 중에서 현재까지 책을 구매해 주신분들께서 보내주신 금액이 벌써 70만원이 넘었어요.
독자들의 품으로 간 책들을 생각하면서 가슴을 콩닥거리고 있답니다.

구매를 원하시는 분들은 아래의 링크에 성함과 주소를 남겨주세요.
https://docs.google.com/forms/d/e/1FAIpQLSfsMbxbXrEGb6YKsZ6B2q3dNz-MQq5XvTuizlM42Gv6qo7llg/viewform?usp=sf_link

      

                                                                                          

그럼 이웃님들, 다음 글은
[교실 속 그림책]크리스마스에서(이진혁 글 그림)과 함께
나를 살게 하는 것들, 의미에 관하여
“솔직히 이걸 해서 내가 얻는 게 뭐야? ”
라는 화두를 가지고 만나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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