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아이>, 도리스 레싱
여자만 혹은 남자만 쓸 수 있는 글이 따로 있을까?
남자들이 생리나 출산을 주제로 쓴 글을 읽을 때 나는 아주 예민해진다. 혹시나 내 고통을 축소하거나, 많은 부분을 왜곡할까봐. 마찬가지로 내가 군대 얘기를 꺼내면 듣는 남자들의 기분이 이상해질 것이다. 직접 겪어보지 않은 일을 짐작해 쓰는 것은 항상 조심스럽다.
성별에 따라 쓸 수 있는 글이 정해지는 건 아니지만, 남자라서 혹은 여자라서 더 잘 쓸 수 있는 글은 분명 있다. '다섯째 아이'는 여자가 썼고, 여자이기 때문에 잘 쓸 수 있는 책이었다. 여자가 읽으면 절절이 공감할만하고 남자들은 한 번쯤 읽어봐야 한다.
"이게 바로 피임법이 발견되기 전에 여인들이 느끼던 감정일 거야."
- <다섯째 아이> 중
나에게 생리는 그냥 좀 귀찮은 것이었다. 한 달에 한번, 수영을 못 가거나 교복 치마에 피가 새지는 않았을까 걱정하는 날. 물론 '그냥 좀 귀찮을 뿐이었던' 건 내가 그 흔한 생리통도 없이, 둔할 정도로 강골 체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자친구가 생긴 뒤로 생리에 대한 나의 감각은 완전히 달라졌다. 귀찮은 것은 물론이고, 한 달에 한 번 피가 터지는 그 날까지 속이 퍽퍽 타는 - 문자 그대로 공포스러운 것. 내 몸이 생리를 한다는, 즉 '가임기' 여성이라는 것의 괴로움과 외로움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공포 그 자체. 매번 여자들은 월경을 기다리다가 그것이 오면 한 달간 처형 연기를 받는 거야."
- <다섯째 아이> 중
이것은 나의 신체에 고환이나 음경 같은 것이 아니라 하필 자궁이 달렸기에 감당해야 하는 외로움이다. 남자친구가 나를 아무리 사랑해도 그의 염색체는 XY고 나는 XX다. 생리 전에 나타나는 미세한 몸의 변화들을 그는 결코 알 수 없다. 생리 예정일을 한주 앞두고, 이상하게 자꾸 잠이 오고, 이상하게 자꾸 가슴이 뭉치는 것 같고, 이상하게, 자꾸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고, 혹시, 혹시, 하며 달력을 뒤적여 보는 것은 온전히 내가 감당해야 하는 일이다. 생리 예정일을 넘긴 어느 날 임신테스트기를 사고, 테스트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도 오롯이 나 혼자의 일이다. 잠시 뒤 결과지에 아무 이상이 없을 때의 그 안도감도, 그 한숨의 깊이도 남자친구의 것과 내것은 아마 아주 다를 것이다. 임테기 시약선이 한 줄로 판명되는 그 시간, 내 앞으로 15년의 인생선은 남자친구의 것보다 훨씬 더 큰 폭으로 휘청거렸을 테니까.
남자친구와 나는 아이를 갖지 않을 예정이다. 우리가 결혼을 안 한 사이라서가 아니다. 우리 둘은 결혼식을 비롯한 한국의 혼인 문화에 매우 회의적이고, 이런 시대에 아이를 낳고 기른다는 것에 대해서도 몹시 조심스럽다. 오랜 시간을 만나 오면서 그와 나는 이런 밑그림들을 함께 맞춰왔다. 그럼에도 남자친구는 혹시나 아이가 생기면 반드시 낳아 키우고 싶어 하고, 나는 웬만하면 지우고 싶다. 내 주변의 워킹맘들이 어떻게 회사를 다니는지, 또 워킹맘이 스스로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려면 주변의 '도움'을 얼마나 많이 필요로 하는지, 같은 여자로서 보아왔기 때문이다.
"병원에 도착할 무렵 뒤틀리는 고통이 있었고 ~ 아기는 나가려고 싸우는 것 같았다. 그녀는 멍이 들었다 -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내부에 엄청나게 거대한 큰 멍이 들었을 것이라는 점을 - 그리고 아무도 이를 알 수 없다는 것을."
- <다섯째 아이> 중
아이가 생기면 남자는 아빠가 되고, 여자는 엄마가 된다. 여자와 남자 모두 많은 것이 바뀐다. 하지만 10개월 동안 몸에 심장을 하나 더 가지고 사는 것은, 내가 먹은 영양분들을 공유하면서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발차기하는 신기한 존재를 뱃속에서 물리적으로 품는 것은 여자다. 그 존재를 목숨 걸고, 살을 찢고 뼈를 깎는 고통으로 낳는 것도 역시 여자의 일이다. 출산 전과 후에 완전히 다른 몸을 갖게 되는 것도 여자다. 내 스케줄과는 전혀 상관없이 때가 되면 젖을 물리고, 유선이 뭉쳐 끔찍한 고통을 겪는 것도 오직 여자의 신체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다. 어제까지는 정돈된 책상에 앉아 업무를 보던 사람이, 아이를 낳고 나면 자기도 모르는 새 흘러내릴 젖 자국을 걱정해야 한다. 세수는커녕 젖병 닦을 시간도 부족하다. 단 30분이라도 아이 걱정 없이 자보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 된다. 이 간극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러다 문득 우울증이 찾아온다. 사람들은 집에서 쉬니까 배부른 소리 한다고 한다.
그녀는 말했다. "제발 저를 히스테리컬한 바보로 보지 마세요."
- <다섯째 아이> 중
<다섯째 아이>는 한 여자의 이야기이다. 아이를 낳아 행복한 가정을 만드려 했던 여자가, 스스로 선택한 아이로 인해 가정의 행복을 모두 떠나보내 버리는 이야기.
이야기의 시작은 이렇다. 고지식한 남녀가 비슷한 서로에게 끌려 만난다. 그들이 꿈꾸는 행복은 유행과는 정반대였다. 아주 큰 집에서, 아이도 될 수 있는 한 많이 낳고, 오만 가족들이 그 집에 모여 파티를 하는 것, 그것이 그들의 꿈이었다. 물론 비현실적이고 철없는 계획이었다. 돈도 없는 주제에 일단 큰집부터 사들인 둘은 다른 가족들에게 민폐를 끼치며 첫 아이를 대뜸 낳아버린다. 그 후로 이 부부, 데이비드와 해리엇은 순풍에 돛 단 듯 아이 셋을 연달아 낳고 나름대로 행복하게 산다.
문제는 <다섯째 아이>. 넷째를 내리 임신하고 출산하는 동안 데이비드와 해리엇 주변의 가족들은 거의 초토화되었다. 모든 친지들이 둘의 아이들을 돌보거나 육아비를 내는데 동원되었고, 그로 인해 정말 도움이 필요한 다른 가족이 외면당하기도 했다. 모두가 이젠 아이를 그만 낳으라는 상황에서 해리엇은 이걸 어쩌나, 또 임신을 해버렸다. 그런데 다섯째 아이는 평범한 아이가 아니었다. 태동은 평소보다 빨리 시작되고 훨씬 강력했으며, 태아는 해리엇에게 아주 이질적인 느낌을 주었다.
"그녀는 과학자들이 크기가 다른 두 종류의 짐승을 접목하는 실험을 할 때 그 불쌍한 모체가 느끼는 것이 이런 것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녀는 누더기를 깊듯이 조각을 붙인 측은한 짐승을 상상했다. 그건 자신에게는 너무나 사실적이었다. 그레이트데인 같은 큰 개나 보르조이 같은 러시아 개와 작은 스파니엘의 합작품, 사자와 개, 덩치 큰 짐마차 말과 작은 당나귀, 또는 호랑이와 염소의 산물. 그녀는 어떤 때는 발굽이, 어떤 때는 갈고리 발톱이 그녀의 연약한 내장을 자르고 있다고 믿었다."
- <다섯째 아이> 중
아이는 마치 온 세상과 전투하듯이, 해리엇을 뚫고 태어났다. 해리엇은 아이에게 '벤'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는 말을 하기 전에 이미 고양이를 죽였고, 자신의 형제자매 그 누구보다 빨리 바닥을 박차고 일어섰다.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려는 듯이. 해리엇은 '괴물'을 낳아버린 것이다.
"벤의 종족은 위쪽 땅 위에서는 빙하시대가 진행되는 동안 땅속 동굴 속에 살면서 어두운 심연의 강물로부터 생선을 먹거나 냉혹한 눈 위로 몰래 나가 곰이나 새를 잡았을까? 아니 사람들, 자신의(해리엇의) 조상들마저도 잡았을까? 그의 종족이 인간 조상들의 여인들을 강간했을까? 그리하여 새로운 종족을 만들었고 그 종족은 번성하다가 사라졌는데 어쩌다 그들의 씨가 여기저기 인간의 모체에 남겨졌다가 벤처럼 다시 나타나는 것일까?"
- <다섯째 아이> 중
도리스 레싱은 해리엇의 상황을 극단적으로 몰고 갔지만, 나는 이 이야기가 괴물을 낳은 해리엇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앞서 책에서 인용한 말들은, 출산을 경험한 여자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고, 감정이다. 나의 힘만으로 통제할 수 없는 존재를 낳아야 하는 여자들 모두의 문제인 것이다. 여자들의 몸속에선 자신도 알 수 없는 것이 자란다. 그러나 그 이질적인 존재를 열 달간 직접 품고 기르면서 서서히 특별한 감정이 길러진다. 그것이 모성이다. 여자라면 날 때부터 누구나 갖는 게 아니라, 몸속에서 직접 새로운 생명 하나를 길러내는 불안 속에서 만들어지는 행운. 모성은 결코 당연하지 않다.
"그녀는 자신의 눈길에다 이런 사고를, 이런 의문을, 자신의 필요를, 그에 대해 더 알고자 하는 자신의 열정을 집어넣었다. 벤이 자신을 거의 죽게 했지만 어쨌든 그녀는 그를 8개월이나 뱃속에 넣고 있다가 출산을 했다. 그러나 그는 그녀가 묻고 잇는 이런 질문들을 느끼지 못했다. 무심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그는 다시 눈길을 돌렸고 그의 눈은 자신의 동료들과 추종자들의 얼굴로 돌아갔다."
- <다섯째 아이> 중
엄마와 자식 간의 단절 역시 꼭 괴물을 낳았을 때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내가 남자아이를 낳았다고 상상해본다. 나는 그 애의 기저귀를 갈 때마다 나와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실감할 것이다. 그 아이의 사춘기에 내가 도움이 될 구석은 별로 없을 것이다. 내 딸이 생리를 시작한다면 나는 그것이 걱정할 일이 아님을 잘 설명할 수 있지만, 몽정에 관해서라면 한마디도 발언권이 없다. 이런 평범한 이질감을 도리스 레싱은 일부러 드라마틱한 설정을 만들어 더 공감할 수 있게 만든 건 아닐까?
"이게 바로 옛날 원시시대에 변종을 낳은 여자를 어떻게 취급했는지 보여주는 거야. 마치 그 여자만이 잘못한 것처럼. 하지만 우린 문명시대에 살잖아!"
"이건 정말 희한해요. 이전에, 아무도 그 어떤 사람도 나에게 <네 명의 정상적이고 똑똑해 보이는 멋진 아이들을 갖다니 넌 정말 똒똑하구나! 그 애들은 모두 네 덕분이야. 훌륭한 일을 해냈어, 해리엇!>이라고 말한 사람은 없었어요. 아무도 이제까지 그런 말을 안 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아요? 하지만 벤에 대해서는 - 전 그저 죄인이죠!"
- <다섯째 아이> 중
출산능력이 있는 덕분으로 여자들은 언제나 육아 문제의 최선봉에 서게 되었다. 아이가 별 탈 없이 잘 클 때에는 딱히 '엄마'의 공이 드러나지 않지만, 아이가 탈선을 하거나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면 항상 가장 먼저 '엄마'의 잘못이 심판대에 오른다. 해리엇 역시 마찬가지다. 벤은 데이빗과 해리엇의 아이지만, 이야기를 짊어지고 가는 것은 해리엇 혼자다.
최근에 낙태금지법 반대 시위를 보면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정확히는 낙태금지법에 반대하는 여자들을 향한 남자들의 시선에서. 낙태라는 말 자체가 참 공격적이고, 부정적이라 쓰고 싶지 않지만, 이 사안에 대한 사람들의 감정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라 부득이 이 단어를 골라 글을 이어가겠다. 인터넷에서 대다수의 남자들이 낙태금지법에 반대하는 여자들을 성생활이 문란하거나, 매춘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 쯤으로 취급했다. 아무리 인터넷 댓글들이라지만 남자들이 별다른 고민도 없이 낙태를 여자만의 문제로 만드는 것을 보고 나는 너무 큰 충격에 빠졌다.
낙태는 임신에서 비롯되는 결과 중 하나인데, 그렇다면 내가 임신 과정을 잘못 알고 있었나 싶었다. 남자의 정자와, 여자의 난자가 만나 수정되는 것이 임신 아니었던가. 아니면 우리나라 여자들은 남자 없이 혼자 임신을 할 수 있었나. 천사들의 수태고지라도 받고 혼자 불쑥 임신을 했단 말인가. 왜 낙태를 하는 상황이 오롯이 여자만의 문제가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이건 남녀, 그러니까 연인, 부부의 문제인데! 남녀가 함께 진지하게 토론을 해나가야 하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쉽게 임신이 여자들의 잘못으로 몰아지는 걸 볼 때, 나는 다시 한번 죄인 된 해리엇의 마음을 느꼈다.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끝끝내 남자친구는 내가 생리가 터질 때마다 얼마나 안도하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알더라도 나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안도감을 느낄 것이다. 그와 내가 서로 다른 감정을 느끼는 것이 슬프지는 않다. 오히려 맘에 든다. 내가 나만의 감정에 빠져있을 때, 그의 다른 시각이 나를 구해줄 테니까. 그에게 바라는 것은 딱 하나. 혹시나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하게 되었을 때, 그 모든 과정에서 나의 감정과 상황을 '올바른 단어'로 이해받고 싶다는 것, 해리엇이 이 이야기 내내 바라 왔던 그것뿐이다.
"이번에는 내가 어떤 기대를 하고 있는가? 자신이 원하는 것은 마침내 누군가가 올바른 단어를 사용하는 것, 그래서 짐을 나누는 것이라고 그녀는 결정했다. 아니, 그녀는 구출받기를 기대하거나 변화를 가져올 만큼 많은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단지 이해받기를 원했고 그녀의 곤경이 제대로 평가받기를 원했다."
- <다섯째 아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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