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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틸킴 Aug 04. 2016

03. 국산형 히어로의 짠내에 대해

<지구영웅전설>, 박민규



다크나이트, 어벤저스, 아이언맨, 엑스맨, 슈퍼맨 대 배트맨…


극장에 볼만한 영화가 정녕 히어로물밖에 없을 때, 히어로물이 걸릴 땐 또 얼마나 많이 걸리던가요.

4,5,6,7,8관 죄다 슈퍼맨에, 그나마 보고 싶은 영화는 내 스케줄과 미리 협의라도 한 것처럼 몽땅 어긋날 때

히어로물 개봉에 대한 기대감으로 들뜬 주변인들에

믿었던 남자친구마저 히어로물 보자고, 아니 그 유명한 다크나이트를 아직도 안 봤단 말이야? 

안 되겠네, 이번 주는 배트맨이다!라는 마포역 상공에 슈퍼맨 날아가는 소리라도 하면

아니 아무튼지간에 히어로물이 히트 칠 때면 전 이렇게 외치고 싶었습니다.

거기 누구 히어로물 싫은 사람 진짜 없어요?


고백합니다. 저는 사실 -맨 공포증입니다.

-맨 영화를 볼 수 없는 병인데, 누군가 억지로 보여주면 중간부턴 잠이 들어버리고 마는 것이 증상입니다.


원인은 아마도 제 주변엔 -맨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일 겁니다


-


대한민국 경제는 항상 위기 아니었나요?

혹시 우리 집만 어려웠을까요?


이상하죠, 내 밑으로 들어오는 인턴은 항상 이렇습니다.


"졸업하고, 이 회사 들어올거냐구요? 아뇨 아뇨, 미국으로 유학 가려구요, 엄마가 보내준대요, 

(요새 세상에 미국 유학이 별거냐는 듯, 영어를 잘 못해서 한국에서 대학 다닌다는 겸양을 덧붙이며) 

아, 오빠도 미국에서 대학 다니고 있거든요"


학교 친구들 중엔 이런 애 꼭 있었구요.


"부모님이 미국에서 오래 회살 다니셨어, 그래서 국적이 미국.. 아아 물론 영언 잘 못해

(내 얼굴에 떠오르는 표정을 보고 위화감을 없애려는 듯 더 크게 웃는다) 하하핫"


타임라인엔 이런 글 꼭 올라오죠.


"아.. 샌프란시스코, 가끔은 그해 겨울이 그리워, 오늘 낮의 태양도 사랑스럽지만 

#샌프란시스코 #추억여행" (나는 좋아요를 누르지 않는다)


어떻게 다들 이렇듯 유복한 겁니까?

친구들은 언제나 프로젝트의 주인공! 모두의 리더! 입니다, 애석하게도.

언제 -맨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죠.


일도 잘하고, 학벌도 좋고, 영어도 잘하는 그들은 어째서 재미로 하는 꽃꽂이마저 완벽한 건지.

식습관이 건강한 건 두말할 필요 없죠, 자기관리는 -맨의 필수 요건이니까.

소주 같은 건 본능이 거부하는 것 같아요.

낯빛은 투명하고 균형을 이룬 얼굴엔 보석 같은 두 눈이 맑게 반짝입니다.

절망적인 것은 착하기까지 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별로 친하지 않은 내 생일까지 축하해주며 '언제 밥 한번 먹자'고 초대합니다.

이 어쩔 도리 없는 프리미엄함, 제 친구들은 내장까지도 100% 미제 실크로 만들어져 있을 겁니다.

삼일에 한번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분변을 생산하는, 곱창에 가까운 저의 내장과는 분명 다를 테지요.


그렇다면 정녕 뭔갈 참고 살고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건가요?

전 모두가 이렇게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요.


요즘 극심한 설사에 시달리기 때문인데, 아마도 바쁘고, 전철을 타고, 

늘 뭔가를 참아야 하는 이곳의 생활이 원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 <지구영웅전설> 중






지금 보니 세상은 어쨌거나 히어로가 있어야 제대로 굴러갈 것 같은 기분입니다.


스티브 잡스의 애플

이건희의 삼성

안철수의 국민의당

강백호의 슬램덩크

손석희의 JTBC


회사에도, 학교에도 히어로들은 언제나 있어왔죠.

콧대도 반듯하고 어깨도 늠름하고 일도 잘하고

게으르게 빈둥댄다든가 도무지 그런 말들은 모르는 긍정맨들.

집단의 밸류에는 조금의 보탬도 되지 않는 저 같은 바보들을 긍휼히 여기는 히어로들이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이 압도적인 슈퍼 파워 앞에 무기력해졌습니다.

히어로물 거부반응은 당연한 거죠.


"넌 미국인이 아니기 때문이야." 슈퍼맨이 얘기했다.


 "그럼 미국인이 될 테야." 내가 소리쳤다.

 "소용없어." 다시 슈퍼맨이 말을 이었다.

 "그런다 해도 넌 백인이 아니니까."


~


 "오 키드, 너무 상심하지 마, 그래도 넌 우리들의 친구잖니."

 ~ 나는 바다의 밑바닥을 유영하는 잠수함처럼 고요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가슴속에서 마치 핵의 융합과도 같은 격렬한 슬픔이 연쇄적인 폭발을 일으켰고, 나는 무수한 기포들을 내뿜으며 저 끝없는 심연 속으로 한없이 잠수해 들어가고 있었다. 

- <지구영웅전설> 중


내가 될 수 있는 건 히어로의 선량한 친구일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저는 -맨 공포증 같은 것에 걸려버린 겁니다.

이제 기억납니다, 처음 그런 공포가 생긴 건 고등학교 교감선생님의 특별한 훈화 말씀을 들었을 때였어요.

그분은 당시 그 학교에서 공부를 제일 잘하던 저와 제 친구를 불러 자신만의 고견을 전수했습니다,

아주 특별한 애정을 담아.


"바닷물을 보아라

바닷물이 바닷물일 수 있는 것은 97%의 물을 3%의 소금으로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는 장차 소금이 되어 사회를 썩지 않게 하는 귀중한 사람이 되어라"


소금밭에서 갓 건져온 소금 원석을 입에 욱여넣은 것처럼 저는 얼굴이 구겨졌습니다.

아아, 바닷물이 바닷물일 수 있는 것은 소금을 소금답게 하는 물이 있기 때문 아닌가요?

소금만 있고 물이 없다면 그건 바닷물인가요, 맛소금인가요?

왜 97%의 물이 되고자 하는 건 나쁜 생각인가요?


어쨌거나 히어로들은 역시 3%인 겁니다, 교감 선생님의 말씀처럼.

3%의 힘이면 세계가 번쩍 들린다거나, 지구가 어제까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자전을 한다거나 하는 일들이 가능해지죠.

물론 세상을 구하는 건 덤, 그들은 언제나 그 자랑스러운 책무를 잊지 않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3%가 되고 싶지 않은 내가 나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건 너무해요.

어쩌다 OMR카드는 잘 찍었기에, 교감선생님이 소금으로 키워보고 싶었지만 

제 모태가 실상 물에 가까워 장차 물이 되려는 게 왜 죄가 되어야 하나요.


잘은 몰라도, 저는 그것이, 당신이 너무 '슈퍼'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당신은 너무 슈퍼합니다. 어쩌면 이 지구는 우리와 당신이 함께 살기엔 너무 작은 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지구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래서 저는 당신께 죄송할 따름입니다. 죄송합니다.

별이 작아 죄송합니다.

물론 제 잘못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 <지구영웅전설> 중


박민규의 <지구영웅전설>은 미국이라는 가공할 히어로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백인+아메리칸의 적통이 아니고선 히어로가 될 수 없는데,

노란 얼굴에 백인의 쏘울을 지녀봐야 노란 껍질에 금방 짓무르기나하는 바나나 정도가 될 뿐입니다.


저는 여기서 토종 국산의 짠내를 맡습니다.

국산은 한우나 고춧가루가 아니면 쓸모가 없는 것 같습니다.

한국형 포켓몬고, 한국형 실리콘밸리, 한국형 알리바바... 이 텁텁함! 이 씁쓸함!


아아 왜 우리들의 조국은 태어나고 자라는 것만으로 입에 짠내가 도는 걸까요!






세상은, 가나안이 아니면 애굽이다.

- <지구영웅전설> 중



제가 있는 곳은 분명 탈출할 애굽도 아니지만 마침내 영광스럽게 입성한 가나안일리도 없습니다.

가나안에 적을 둔 나의 -맨 친구들이 어서 와 손짓하는 가운데,  

저 낯선 민족들처럼 저는 황야를 떠돌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물론, 당신이 아프거나 못 지냈을 리 만무하지만, 아무튼 저는.. 그렇게 묻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도무지 어떤 안부도 지구 최강의 사나이와는 어울리지 않아, 이미 서두에서부터 진땀을 흘리는 중입니다. 그렇습니다. 어쩌면 안부란 것은, 약하고 평범한 인간들끼리 주고받는 일종의 위로가 아닐까, 란 생각이 당신께 보내는 편지를 시작하면서 강하게 드는 새벽입니다.

- <지구영웅전설> 중


어쨌거나 저는 지구에서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척추를 바로 세우기 위해 괄약근에 힘 줘가며. 

소금이 못된 97%의 내 친구들과 안부를 물어가며.


그래서 뭐 어쩌라고요?

그냥 그렇다구요.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1. 수퍼 히어로가 되고 싶은 사람 

2. 수퍼 히어로에게 상처 받은 적 있는 사람

3. 박민규빠

4. 짧고 재미있는 책을 읽고싶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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