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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틸킴 Oct 19. 2017

수의 받침


수, 한숨조차 가벼웠던 수, 너를 받치는 게 나였으면 했는데. 그래왔던 것처럼 너는 흘러가 버렸네.

 
수, 그림을 그리고 글을 붙이는 여자. 프리랜서. 키가 작고 마른 체구. 아몬드 모양의 큰 눈. 수를 처음 만났던 어느 일요일 저녁, 내가 수에 대해 알았던 것들. 사람이 가득한 카페에서 수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수, 난 내 이름이 쓸쓸해요. 집이 되려다 만 것 같아서.
처음 만난 자리에서 수는 작은 스케치북에 자기 이름을 써보이면서 말했다. 왜 초등학생 때는 아파트에 살아도 집을 그리라고 하면 지붕을 세모로 그렸을까요. 그래서 그럴까요, 세모 지붕 밑엔 네모 벽이 있어야 안심이 돼요. 그게 완성인 것 같아서. 하나의 집으로. 
그런데 내 이름엔 받침이 없네요. 

그 말의 끝에 수는 웃음을 붙였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수에게 반했다. 꼬마 주인은 엄마가 불러 뛰쳐나가고, 그려지다 만 채로 남겨진 스케치북 같은 이 작은 여자애에게.
 
나는,
이 사람의 받침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수, 이젠 너의 이름을 잊어야 할 때. 아직까진 집 비슷한 글자를 봐도, 집이 되다만 글자를 봐도 경보가 울리지만.
수, 너의 눈빛을 우리 집에 가둬둘 수 있었다면.

수가 내 집에 있을 때 나는 집이 된 것 같았다. 유사 가정처럼, 우린 장을 보고 서로의 샤워를 기다려주고, 서로를 재우고 또 깨웠다.
수, 는 떠났다. 나는 붙잡았다. 수는 아무 말 않았지만, 한숨의 의미는 정확했다. 이젠 돌아오지 않아.
수, 는 떠나고 나는
 
숙,제처럼 집에 남았다. 텅 빈 집은 어째서인지 더 무거워졌다. 수가 없는 저녁은 아직 내가 손댈 수 없는 문제였다. 할 일 없이 야근을 해보았다. 기다리는 사람이 없는 퇴근은 기다려지지 않았다. 훈련의 끝을 기다리는 선수처럼 나는 꾸역꾸역 초침에 집중했다. 56, 57, 58, 59, 60 이제 겨우 1분이 지났다. 회사를 나와서는 헬스를 등록했다. 학원가를 서성거렸다. 영어학원에서 누가 영어 배우냐. 다 눈 맞으러 오는 거야. 토익 스터디원과 눈이 맞아 결혼한 친구는 영어회화를 추천했다. 아, 교회 나오라니까. 교회 여자들 다 착해. 몸도, 마음도. 개신교 친구는 개종을 권유했다.
 
순,정. 연애의 끝에 발견한 나의 재능.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 거야, 새 사람 만나봐. 진짜 괜찮은 여자야. 소개팅을 거절하면 친구들은 나를 순정파라고 놀려댔다. 문득 궁금했다. 순정 사랑과 아닌 사랑이 있을까. 수는 나에게 순정이었을까. 나는 수의 집에 맞는 순정부품이었을까. 질문과 대답들이 흘러가는 동안 나는 살이 빠졌다. 나는 수가 쓰던 숟가락들을 버리지 못했다.
 
숟,가락. 수의 입에 들어갔던.
수는 자주, 내 손가락을 찾아 물었다. 깨물고 핥았다. 수의 작은 입. 내 손가락으로 가득 찬.
신기하지 않아? 같은 이불을 덮고 누워 수는 말했다. 숟,가락. 손,가락. 입과 집. 먹여줄 수 있는 것들.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것들. 동그랗게 울리는 발음들. 네가 네 숟가락에 밥을 잔뜩 올려 내 입에 넣어주는 순간들. 너의 손가락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시간들. 수는 자기가 사랑하는 것들을 외워보았다. 동그랗게 몸을 말고 내 품에 안겼다. 나는 수의 입술과 혓바닥이 자꾸만 생각나서, 차가운 숟가락을 입에 넣을 수 없었다. 수의 숟가락이 쓰임새를 잃는 동안 나는 말라갔다.
 
술. 사내놈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위로. 마시자. 잊자 잊어, 수인지 수린지 지랄인지. 술은 마시고 싶지 않았지만, 친구들을 위해 나는 술자리에 나갔다. 그들의 노력이 내게 도움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 관계엔 그런 감정이 필요한 법이니까.
 
숨. 숨 쉬는 것보다 참는 시간이 더 많았던 날들. 수를 만나는 것은 그런 시간이었다. 숨을 죽이고 수의 입 모양에 집중하는 시간. 숨을 참고 수의 눈을 들여다보던 시간. 수의 숨소리를 듣던 시간. 그런 시간에 수는 말했다. 숨을 거두었단 말이 좋아. 숨이라는 글자엔 공기가 머물잖아. 수를 받친 네모난 공기 창고. 공기를 묶어두는 글자. 내가 죽으면 날 죽었다고 말하지 말아줘. 나는 숨이 지는 거야. 더는 숨 쉴 필요 없어서 모아둔 숨을 그만 놓아버린 거야.
 
숱 많은 수의 머리카락. 수의 조그만 숲. 그 길을 헤집는 동안 수가 했던 말들. 옛날 사람들은 숲을 숩으로 썼대. 숲이란 말, 귀여워. 풀들이 느껴지잖아. 네가 웃어주는 것만으로도 완벽했던 시간들. 그 시간 끝에 고어가 된 내가 있다. 아무도 쓰지 않는 말이 되어 혼자 고여버린 내가.
 
수, 와 헤어지고 나는 글을 썼다. 내가 출근한 동안 수가 집에 혼자 남아 그랬던 것처럼. 매일매일 조금씩. 수의 이름 밑에 여러 가지 받침을 대보았다. 숙, 순, 숟, 술, 숨.... 모든 받침에 이야기가 있었다. 숫기 없는 수의 얼굴. 숯처럼 까만 수의 눈동자.
 
수, 는 떠났다. 아니 사라졌다. 수의 가벼운 한숨처럼. 소곤소곤한 숨소리처럼.
 
나는 내가 수를 묶어둘 네모 받침이길 바랐다. 나와 수가 합쳐져 숨이 되었으면 했다. 수를 완성하는 게 나라는 욕심을, 너의 결핍은 나만이 채워줄 수 있다는 신념을 수는 보란 듯이 박살 냈다. 떠남으로써.  
 
14개의 자음 중, 수를 받칠 수 없는 세 글자. ㅈ, ㅋ, ㅎ. 나는 수에게 그런 받침이었을까, 수를 떠나보냈던 이전의 남자들처럼. 나는 ㅋ이었을까. 아니면 ㅎ이었을까. 진지함을 감추려 문장의 끝마다 아무렇게나 붙인 웃음 같은 거였을까.
 
어쨌거나 수는 떠났다. 그리고 지금, 받침 없는 글자처럼 혼자 서있는 건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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