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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틸킴 Sep 15. 2017

성혁이

분신사바 분신사바 오딧세이 그랏세이

사람들이 어쩜 그렇게 무식해? 게으르고, 욕심도 없고.
엄마는 걸핏하면 동네 사람들 흉을 봤다.

  
강에 붙은 마을이라 먹을 게 많아 그렇지.
아빠는 마을 대표로 변명했다. 무식의 기준이 학벌이라면, 엄마의 말은 사실이었다. 우리 마을엔 1990년대 중반까지도 대학을 나온 사람이 없었다. 그러는 엄마도 고졸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서울 새댁이었다. 그 점이 아주 달랐다.

나, 티코 한 대만 사줘. 내가 면허 따서 서은이 학교 데려다주고 데려올게.
엄마는 자주 아빠와 싸웠다. 이유는 나였다. 엄마는 나를 신도시로 전학시키고 싶어 했다.
아니 가까운 학교를 두고, 왜 생고생을 시켜. 왔다 갔다만 해도 두 시간인데.
그럼, 서은이 이 촌구석에 썩게 둬? 저 멍청한 애들이랑?
엄마는 금세 카랑카랑해졌다. 아빠의 속 편한 대답에 속이 터지는 것 같았다.
한 반 스무 명짜리 시골 학교 다니다, 대학도 못 가면 어쩌려구!
아빠의 대답은 항상 생각보다 더 태평했다.
지금도 1등인데 뭐가 걱정이야.

내 친구들은 뮤직뱅크도, 순풍 산부인과도 실컷 봤다. 반장네 집엔 패미콤은 있었지만, 책은 전과뿐이었다. 나로 말하자면 7시 이후엔 TV를 볼 수 없었다. 책장엔 엄마가 큰 맘 먹고 산 브리태니커 백과사전과 각종 명작소설들이 있었다. 또한 우리 집은 바이올린 보면대와 피아노가 있는 유일한 집이었다. 윤선생 전화 영어도, 신문 NIE도 오직 나만 하는 것이었다. 나는 능내리 촌구석에서 가장 서울에 가까운 아이였다. 서울 새댁이 낳은 딸이니까 1등은 당연했다.

방에서 엄마 아빠가 싸우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신도시의 학교를 떠올렸다. 한 학년에 반이 15개씩 있는 큰 학교. 실내 체육관이 따로 있고, 축구부도, 육상부도 따로 있는 학교. 그런 학교 정문에 예쁜 치마를 입고 차에서 내리는 나의 모습을 상상했다. 내가 서울에서 태어났으면, 나도 서울 언니만큼 예뻤을까.

4학년 여름방학도 신도시로 전학가지 못하고 끝났다.
개학을 하니, 남자애 하나가 전학을 왔다.
서울에서 전학 온 오성혁이야. 모두들 새 친구에게 박수.
성혁이는 특별히 좋은 샤프를 쓰거나 브랜드 옷을 입진 않았다. 그러나 기품이 있었다고 할까. 몸가짐이나 말투 같은 것들이 달랐다. 짐승처럼 으르렁거리고 주먹질하는 우리 반 남자애들과는 특히 달랐다. 아무 데나 코딱지를 묻히지도 않았고, 옷소매도 깨끗했다. 무엇보다, 성혁이가 전학을 온 덕분에 나의 반 1등 타이틀에도 비로소 의미가 생겼다. 이건 서울 아이와 경쟁해서 얻어낸 성취.

성혁이는 남자애들보다는 여자애들과 잘 어울렸다. 축구보다는 고무줄이나 공기놀이를 했다. 특히 나랑 친했다. 우리 반에서 서울 아이와 대화가 될 정도로 똑똑한 애는 나 하나였으니까. 성혁이도 나처럼 특활을 도서부로 들었다. 우리는 둘밖에 없는 도서실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인디언의 야구, 개미들의 생태, 단풍나무 씨의 회전, 어른이 되면 하고 싶은 것들.
 
가을 운동회가 끝나고, 분신사바 열풍이 불었다. 빨간색 펜을 끼운 손을 두 사람이 맞잡고, 귀신을 불러내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는 것. 여자애들은 모두 손을 맞잡고, 좋아하는 남자애에 대한 이야기나 죽은 강아지에 대한 것들을 물어보았다. 분신사바에서 남자애들은 항상 빠져있었다. 남자애들끼리 손을 붙잡는 건 징그럽고, 여자와 남자는 손을 잡으면 안 되니까.

나도 분신사바 해보고 싶다.
특별활동이 끝나고 성혁이가 말했다.
나랑 할래?
진짜? 그래도 돼?

뭐, 남자와 여자는 손을 잡으면 안 되지만, 성혁인 서울 아이잖아. 그래도 돼. 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다른 아이들이 다 집에 갈 때까지 느릿느릿 교실 청소를 하며 기다렸다가, 병설유치원 놀이터로 도망쳤다. 그리고 비품 상자에서 몰래 빼온 A4용지를 펼치고 서로 손을 잡았다. 성혁이의 손이 축축했다. 빨간 펜을 맞잡은 손에 끼우고 성혁이와 나는 같이 눈을 감았다.

분신사바, 분신사바, 오딧세이 그랏세이.

남자아이와 손을 잡고 외국말을 하는 내가 서울 여자아이처럼 느껴졌다.

귀신님, 오셨습니까. 성혁이가 물었다.
나는 귀신이 좀 더 늦게 와도 좋을 것 같았다. 눈을 감은 채로 성혁이의 손바닥을 더 잡고 싶었다. 하지만 펜은 금방 동그라미를 그렸다. 귀신이 왔네. 실망스러웠지만 눈을 떴다. 성혁이가 흥분에 찬 얼굴로 마주 보았다.

성혁이가 귀신에게 우리의 나이를 물어보았다. 귀신은 우리의 나이를 귀신같이 맞췄다. 이번엔 우리 둘 중 어느 쪽이 남자냐고 물어보았다. 귀신은 거침없이 성혁이 쪽으로 펜을 그었다. 귀신은 여자였다. 자동차 사고가 나서 죽은 고등학생이었다. 그때 다리가 부러졌는데, 그건 정말 끔찍한 경험이었다고도 했다.

그래서, 너도 나 좋아해?
진짜 물어보고 싶은 질문은 꼭 참고, 나는 쓸데없는 질문만 했다. 대신 성혁이의 손을 꼭 잡았다.

선덕여왕은 살해당했나요? 정말 오줌 싼 꿈을 팔았나요?

귀신과의 이야기는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종이가 부족해서 몇 장이나 바꿔 끼웠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어두운 놀이터 뒤로 산비둘기가 울었다. 우욱 우욱 욱욱.
갑자기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귀신은 듣지 못하게 성혁이에게 입 모양으로만 말했다.
이제 집에 가자.
성혁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귀신님, 이제 그만 보내주세요.
내가 말했다. 귀신은 엑스표를 그렸다. 소름이 돋았다. 

분신사바는 귀신과 헤어지는 게 가장 중요했다. 빨간 펜에 귀신이 깃들어 대답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귀신이 보내줄 때 가지 않으면 귀신이 붙는다고 했다.
우리 아직 가면 안 되나요?
성혁이가 말했다. 귀신은 동그라미를 그렸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저 이제 가야 해요, 엄마한테 혼나요, 보내주세요.

내가 울먹이며 말했다. 귀신이 엑스자를 얼마나 심하게 그었는지, 종이가 찢어졌다. 

그 바람에 성혁이의 손을 놓쳐버렸다. 아니, 사실 무서워서 놓아버렸다.
빨간 펜이 중심을 잃고 툭 쓰러졌다. 성혁이가 나를 쳐다봤다.
종이, 찢으면 되는데. 이럴 땐.
발발 떨면서 나는 대응책을 말했다.
그럼 내가 찢을게.
성혁이가 말했다.
정말? 근데 너한테 귀신 붙으면? 하고 성혁이한테 물을 뻔한 걸 가까스로 참았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성혁이는 찢은 종이와 펜을 소각장에 버리자고 했다. 자기 아빠도 장례식에 갔다 오면 갖고 갔던 고춧가루를 불에 태운다고 했다.
다 태우면 돼.
성혁이가 종이를 북북 찢더니, 가방을 멨다. 나도 일어나서 가방을 메고, 모래를 털었다. 성혁이가 앞장섰다. 뒤따라 걸으니까 혼자 걷는 것처럼 무서웠다. 분신사바 종이를 잡지 않은 쪽 성혁이의 소매를 얼른 잡았다. 성혁이가 내 손을 잡아줬다. 학교 뒤뜰엔 조명 하나 없었고, 멀리서 테니스를 치는 선생님들의 목소리만 들렸다. 소각장에 분신사바 종이를 다 버리고 성혁이는 말했다.
어차피 소각하는 날이니까
. 걱정 없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혁이는 정말로 믿음직스러웠다. 우리 반 남자애들 중 그 누구도 성혁이처럼 행동하진 못할 거였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교문으로 뛰어갔다. 뒤돌아 학교 시계를 보니 일곱 시 반이었다. 공중전화에서 콜렉트콜로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엄마가 소리소리를 질렀다. 나는 친구와 도서관에서 책 읽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데리러 오면 안 되냐고 했다. 성혁이는 우리 엄마가 올 때까지 기다려줬다가 집으로 걸어가겠다고 했다. 성혁이네는 산길을 20분 걸어야 나왔다. 성혁이를 태워줘야 하나 고민했던 찰나에 
성혁이가 먼저 걸어가겠다고 하니 내심 고마웠다. 남자아이와 같이 있었던 걸 엄마한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곧 엄마가 왔다. 엄마는 나를 좀 혼냈지만, 시간도 잊고 책에 파고든 집중력이 더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밤새, 나는 성혁이와 손을 잡고 걷다 자동차 사고가 나는 꿈을 꿨다. 아침에 일어나니 심장이 쿵쾅댔다. 어제 학교가 끝나고 내내 성혁이의 손을 잡고 둘이서만 이야기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어쩐지 되게 큰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우리 반엔 남자아이와 손을 잡는 여자 아이는 없다. 나만 빼고. 어서 학교에 가서 성혁이와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리고 성혁이는 그날 학교를 나오지 못했다.
 
다음날 학교에 갔을 때 성혁이는 책상에 엎드려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다가가 야!라고 했더니, 성혁이가 겨우 고개를 들었다. 눈이 빨갰다. 콧구멍에서 하얀 콧물이 비죽 흘러나왔다. 나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성혁아, 괜찮아?라는 말이 목이 메어 나왔다. 성혁이는 이번에도 겨우겨우 고개를 끄덕이더니, 소매로 코를 슥 닦고 다시 고개를 파묻었다.
 
나중에 
친구들한테서 성혁이가 귀신에 씌었었단 얘기를 들었다. 걔가 선생님 심부름을 하다 집에 늦게 가게 됐는데, 숲길에 웬 여고생이 나타났는데, 무릎 밑이 완전 아작나 있었대. 근데 그 귀신한테 명찰이 있어서 이름도 봤대! 주소영? 이런 이름이었대! 엄청 무섭지?
등줄기에 소름이 쭉 돋았다. 주소영은 우리가 불렀던 분신사바 귀신이었다.
성혁이는 그날 밤 내내 귀신에 시달리느라 한숨도 못 잤고, 그러더니 심한 몸살에 걸렸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 성혁이와는 어쩐지 서먹해졌다. 아무리 노력해도
 콧구멍에 맺혔다가, 뽕- 하고 터졌던 성혁이의 콧물 방울이 잊히질 않았다. 5학년이 되기 전에 성혁이는 다시 서울로 이사를 갔다. 나는 신도시로 전학을 가지 못하고, 한 반 20명짜리 촌구석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래도 엄마의 걱정과 달리 서울의 대학에 합격했다. 서울에 직장도 얻고, 주민 등록도 했다.

서울, 서울, 서울, 아름다운 이 거리. 서울, 서울, 서울, 별들의 고향.
당연하게도 서울에서의 내 삶은 노랫말처럼 아름답지는 않고,
이제 나는 분신사바나 단풍나무 씨의 회전 같은 것과는 멀리, 멀리서, 가끔 궁금해한다.
그날, 내가 이제 가도 되나요?라고 물었을 때 X를 쳤던 건 성혁이었을까. 아니면 나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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