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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틸킴 Nov 01. 2017

박상규는 왜 시발을 말하지 못했나


시발. 박상규는 시발이라고 말했어야 했다. 거래처 사장과 회사 팀장과 그의 선배 모두에게. 시발을 말할 권리가 박상규에겐 있었다. 그러나 끝끝내 그는 목구멍 속에 그것을 숨겨두었다. 그의 미소도 입술 언저리에서 꾸역꾸역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박상규는 지금에서야 시발을 화면 속에 때려 넣고 있다. 오전 한 시 십오분. 난타의 감각이었다. 열 손가락 모두를 이용해 ㅅ+ㅣ+ㅂ+ㅏ+ㄹ. 마음 같아서는 시프트키를 골백번이라도 후드려쳐 모든 자음을 된소리로 바꾸고 싶었으나 너무 격한 발음은 박상규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았다. 오늘은 ㅅ과 ㅂ으로 이 분노를 만족하련다. 쿨하게 시발.
 
박상규는 왜 시발을 말하지 못했나. 누구에게도 시발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배의 무임승차와 팀장의 뻔뻔함과 거래처 사장의 변덕은 모두 시발스러웠으나 그래 그건 그들의 탓이 아니다. 이것은 말의 탓이다. 말은 왜 머물지 않는가. 어찌해서 말은 왼쪽 귓구멍으로 들으면 오른쪽 귓구멍으로 빠져나가 버리고, 누가 달아주지 않아도 알아서 발이 생겨 천 리를 달리고 대기권을 뚫고 날아가 우주로 증발하는가. 말에도 얼굴이 있다면 박상규는 당장에 그놈의 목을 조르고 싶었다. 박상규는 똑똑히 들었다.
 
우리 신제품 디자인 말이야, 빨간색 어때. 이건 거래처 사장의 말.
중국을 생각하면 역시 빨간색이죠. 이건 팀장의 말.
…!. 이건 선배의 말.
 
2주 전에 거래처 사장은 신상품 디자인으로 빨간색을 점지했다. 정열의 색. 피의 컬러. 심장을 움직이는 강렬함. 이게 바로 엄마들의 마음을 자극할 거야. 네? 지금 그게 말입니까, 말 우는 소리입니까? 속으로만 생각했다, 박상규는. 신생아용 오가닉 기저귀 - 땡큐 기저귀의 포장으로 피의 컬러는 지나친 것 아닌가 생각했으나, 팀장은 중국에서 태어날 수억 명의 신생아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수억 명의 산모들이 손에 쥘 땡큐 기저귀도 생각했다. 이 건만 대박 나면 우리도 이제 상장해야지. 땡큐 기저귀, 땡큐!
 
선배는 뒷짐을 지고 박상규의 뒤에 서서 박상규의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상규야, 뭐 좀 없냐. 박상규 모니터의 컬러단자들은 보름 내내 빨간색만 송출했다. 베이비 레드, 소프트 레드, 버건디 레드. 레드는 종류가 많았다. 그러는 동안 박상규의 흰자위도 강렬한 레드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여섯시간 전. 박상규는 다시 한번 똑똑히 들었다.
 
이 색깔은 이게 뭔가? 아주 피 칠갑을 하지 그랬나? 신생아 기저귀에 빨간색이 말이 되나? 거래처 사장의 말.
아, 지난번 회의 때, 팀장의 말은 여기까지.
그러니까 빨간색으로 된 게 내 책임이라는 건가? 다시 거래처 사장의 말.
아뇨~ 지난번 회의 때 우리 막내가 중국을 생각하면 역시 레드라고, 팀장의 말은 다시 여기까지.
아, 하얀색! 기저귀고 오가닉이니까 하얀색이 좋겠어요! 이건 선배의 말. 퓨어하게. 선배는 덧붙였다.
그래, 이 친구 똘똘하네. 내일 모레까지 하얀색으로 다시 해주게. 당신들 때문에 시간 까먹은 거 생각하면 당장 업체 바꿔도 시원찮은데, 쌓은 정이 있어 봐주는 거야. 다시 사장의 말.
시발, 늬들 장난하냐. 늬들이 빨간색이라며. 이건 박상규가 하지 못한 말.
 
순식간에 레드는 화이트가 되었고, 그 변천사는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다. 그래, 이것은 말의 문제다. ‘착하게 살자.’ 그래서 조폭들은 혹시나 까먹을까 봐 좌우명을 팔뚝에 문자로 새긴 것이다. 떠다니는 말을 붙잡아 한글자 한글자 섬유조직에 새겨놔도 기억을 할까 말까 한다. 그러니 글이 되지 못한 말은, 그냥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 이건 누구의 탓도 아니다. 날아가는 말을 누가 당할 것인가.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는데, 말이 기껏해야 사무실 창문을 넘어 마포 상공을 벗어난 건 아무도 탓할 수 없다.
아니 잠깐, 문자가 되지 못한 말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그렇다면 박상규는 왜 시발을 말하지 못했나.
 
박상규의 시발은 달랐다. 그의 혓바닥이 ㅅ을 입 밖으로 밀어내는 순간, ㅅ은 거래처 사장의 고막을 진동시킨 후 자가증식할 예정이었다. ㅅ 더하기 ㅅ은 ㅆ.
 
이런 씨부럴 놈이? 그렇게 똑똑하면 니가 사장하지 그러냐?
 
그러므로 박상규는 시발을 말하지 않았다. 말은 불평등하다. 어떤 말은 모두가 잊고 어떤 말은 모두가 기억한다. 박상규의 시발은 그 누구도 들어선 안 됐다. 듣는 순간 영원히 신입사원 박상규가 거래처 사장한테 시발이라고 했대 전설처럼 전해질 것이므로. 하지만 박상규는 목에 걸린 시발을 뱉어내지 않고는 잘 수가 없었다. 누구든 좀 기억해주었으면 했다. 사장, 팀장, 선배를 빼고 남은 지구인 그 누구라도. 그래서 박상규는 컴퓨터를 켜고 기어이 페이스북에 들어가 시발 시발 시발 난사를 한 것이다. 시발.
 
글은 말보다 세다. 쓰는 것은 격투의 감각이다. 연필은 찢고 키보드는 때린다. 시발시발시발 아주 빠르게 쓰다 보면 연필은 종이를 찢고 시발시발시발 아주 빠르게 치다보면 자판은 박살난다. 글은 무기가 될 수 있다. 게다가 글은 오래가지 않는가. 잘만 보존하면 서기 502001021년까지 남아있을 수도 있다. 말머리 성운의 미치아카토퓨타도 박상규의 시발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페이스북 서버가 유지된다면 말이지만.
 
그리하여 박상규는 시발을 말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페이스북의 친구들을 증인으로 글을 남겼다. 오늘 이 시발스러운 하루를 기록할 성스러운 의무를 지닌 사관처럼. 시발. 박상규는 시발을 한 번 더 때려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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