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여자 군인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길을 떠나려 한다. 그녀는 임무를 마치고 살아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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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무에 투입되기 전 수많은 짐을 싸봤지만, 이렇게 단촐한 짐을 싸본 것은 처음이다. 어찌 될지 모르는 길을 가야 할 때는, 바로 그 어찌 될지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챙겨야 할 것들이 참 많기도 했었는데... 돌아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으니까 선택과 결정이 매우 명료해진다.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들이 너무 분명하게 보이는 것이다. 마지막이 주는 지혜라는 게 바로 이런 것이려나? 배낭 끈을 힘차게 묶어 빠르게 짐 싸기를 마무리하고 나니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사실 생각해보면, 지난 수많은 전투들 또한 언제나 죽을 수 있는 위험이 상존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난 언제나 살 수 있을 거라고,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젊어서 그랬던 걸까? 아니면 전부 이길 수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일까? 나는 절대 다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던 걸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럴 수 있었던 과거의 내가 그저 신기할 뿐이다. 마치 보이지 않는 보호의 망토를 두르기라도 한 것처럼 참 용감하게 전장을 뛰어다녔었다. 그때의 나는 무모했으나 일견 행복했던 것 같기도 하다.
짐을 다 싸고 나니 동이 틀 때까지 딱히 할 일이 없었다. 평생을 수많은 할 일에 치여 시간을 분 단위로 아껴가며 살았는데, 막상 내일이 없다고 생각하니 딱히 해야 할 일도 없었다. 부모님께 편지를 남기는 일 따위는 하지 않을 생각이다. 내가 돌아오지 못할 걸 알면서도 갔다는 걸 아시면 내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힘드실 것이다. 군인은 전쟁터에서 죽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고 영광이다. 그냥 그렇게 가는 것이 좋다.
어젯밤에는 컴퓨터 안에 있는 모든 파일을 삭제했다. 마음 같아서는 방에 있는 물건들도 전부 소각해버리고 싶었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더라. 세상에서 나의 흔적을 완벽하게 지우고 떠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나를 알았던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각자의 생각으로 색칠된 채 조각조각 남아있게 되겠지. 세상엔 온통 내가 어쩔 수 없는 일들 투성이인데, 그걸 받아들이는 것이 왜 그리 힘들었을까.
나는 천천히 일어나 나의 방과 마지막으로 인사했다. 내 모든 것을 조용히 지켜본 존재. 비바람으로부터 나를 따뜻하게 지키고, 홀로 있는 나를 온전히 품어준 소중한 공간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작지만 포근한 이 공간에서 늘 회복되어 다시 세상에 나갈 수 있었음이 감사했다. 지금 이 순간조차도, 이 공간의 말없는 응원에 힘입어 군화를 신을 용기를 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특별할 것 없다. 꼭 전쟁터가 아니어도, 죽음의 가능성은 단 한시도 날 떠난 적이 없다. 그냥 친구다, 친구. 다만 오늘은 그 친구와 손을 맞잡게 된다는 것이 다를 뿐. 가자, 더 이상 꾸물거리지 말고. 그냥 가자.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처럼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