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래전에 연락이 끊긴 룸메이트(or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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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친구 중에 J라는 친구가 있었다. 나와 학번이 앞뒤 순서여서 1학년 때부터 자연스럽게 친하게 되었다. 그 아이는 키가 작았고, 눈은 컸으며, 패션 센스가 나와는 달리 굉장히 과감했던 친구였다. 패턴이 크고, 색이 화려한 옷을 즐겨 입었고, 미국 여배우나 쓸 법한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다니기도 했었다. 성격도 호탕한 면이 많았는데, 이스라엘로 워킹 홀리데이를 떠나서, 거기서 고생하는 얘기를 장문의 편지로 내게 알려주기도 했었다. 밥을 먹으러 가거나, DVD방에 영화를 보러 가거나, 대학로 콘서트를 보러 가거나 할 때도 늘 동행했던 친구였다.
4학년이 되어서 나는 소규모 클래식 공연기획사에 먼저 취업이 되었지만, 7개월만에 그만 두게 되었고, 그 친구는 우리 과 학생들이 주로 가던 대기업에 취업이 되었다. 당시 나는 대학원에 다시 들어가 고급 백수 신세였고, 늘 돈이 부족했다. 그래서 J는 자기 회사에 쏠쏠한 일일 알바 자리가 있는데, 한 번 해보지 않겠냐고 전화를 걸어왔다. 난 무조건 한다고 말하고 다음 날 J의 회사로 찾아갔다.
내가 하게 된 일은 창고 같은 빈 공간에 앉아서, J의 회사에 대한 홍보 전단을 접어서 봉투에 넣고, J가 준 명단에 있는 회사의 주소를 라벨 작업해서 붙이는 단순 업무였다. 일 자체는 하나도 힘들지 않았지만, 그 일의 무의미성이 나를 힘들게 했다. 이 편지들은 보나마나 아무도 읽지 않은 채 바로 쓰레기통으로 직행하게 될 게 뻔했다. 한 마디로 스팸 편지들. 물론 나는 하루종일 이 일을 하는 대가로 약간의 돈을 받게 되겠지만, 이 세상에 불필요한 쓰레기를 양산하는 일로 여겨져서 심적으로 몹시 괴로웠다.
하루가 끝나고 J는 내게 5만원이 담긴 봉투를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고생했어. 내일도 또 와서 할래?"
나는 차마 이 일이 무의미해서 더이상은 하고 싶지 않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무 핑계나 대면서 더는 하기 싫다는 뉘앙스로 거절을 했는데, J가 나를 한심한 표정으로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네가 배가 불렀구나?"
...
네가 배가 불렀구나... 그 말이 내 자존심을 잔인하게 후벼팠다. 나는 그 길로 J의 회사를 나와 곧바로 핸드폰 번호를 바꿔버렸다. J와는 그걸로 끝이었다.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계속.
오랜만에 그때 그 일을 다시 회상해보면서, 그 당시 내가 얼마나 자존감이 낮고 위축되었던 상태인지가 여실히 느껴졌다. 좀 더 의미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할 용기도 없었고, 네가 보기엔 배가 부른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사실 배가 많이 고프다고, 그래도 조금은 더 일할 의욕이 나는 일을 하고 싶은 거라고 설명할 힘도 없었다. 그저 오랜 친구의 다소 무례한 한 마디에 만신창이 상태가 되서는 도망가기 바빴다.
하지만... 저 말은 아직도 기분 나쁘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고로, 일부러 J를 다시 찾아 관계를 회복시킬 마음 같은 것은 없지만,
그래도 지금 어디서 무얼 하며 살고 있든 잘 살길. 그 정도 마음은 내어줄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