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승달은 보름달이 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작은 그릇은 큰 그릇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는 첫 두 페이지를 읽고 나서, 그 뒤는 더 이상 보지도 않고 구매했던 그림책이다. 이거 두 가지만 알아도 사는 게 얼마나 쉬워질지, 편안해질지 잘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 무엇이 되기 위해 산다. 지금 내 모습은 보잘 것 없지만, 미래엔 지금보다 돈도 많고, 지위도 높아지고, 능력도 많은 사람이 되기 위해 지금을 견디면서 지나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말인즉슨, 아직 오지 않은 그 완벽하고 빛나는 모습의 내가 되기 전까지는, 그 전의 나는 그저 미생에 불과한 것이다. 아직 온전한 존재가 아니고, 부족하고 미완성인, 해야 할 것도 많고, 갈 길이 먼 존재다. 무엇이 되려는 생각이 있으면 그렇다.
그리고 우리가 되려고 하는 그 무엇인가는 주로 큰 것을 뜻한다. 크기가 더 큰 것, 그래서 더 좋아 보이는 것. 초승달보다는 보름달, 작은 그릇보다는 큰 그릇, 야구공보다는 축구공, 조약돌보다는 바위, 작은 차보다는 큰 차, 멸치보다는 고래, 작은 꽃보다는 큰 나무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도대체 인간은 어째서 작은 것보다 큰 것이 무조건 좋다고 생각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우주에서 다른 생명체들과 비해서 우리가 지극히 작고 미약한 존재여서 그런 걸까? 그래서 더 크고 강한 존재가 되고 싶어하는 걸까?
하지만 크기와 가치는 전혀 다른 문제다. 크기와 상관없이 모든 물체, 혹은 생명체에게는 그 나름의 고유한 존재 가치, 존재 의미가 있다. 각각의 존재는 특징도 다를뿐더러, 각각의 기능도 다 다르다. 야구공은 투수의 손 안에 쏙 잡혀야 하고, 바람을 가르며 최대한 마찰을 줄여서 빠르게 날아가야 하고, 배트에 맞아도 터지지 않을 만큼 야무지게 단단해야 한다. 우리는 절대로 축구공을 가지고 야구를 할 수 없다. 야구를 할 땐 반드시 야구공으로 해야 한다. 축구를 야구공으로 할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작은 그릇과 큰 그릇의 경우도 똑같다. 큰 그릇은 큰 그릇이 필요할 때가 따로 있다. 손님들이 와서 많은 양의 음식을 담아내야 할 때, 크기가 큰 음식을 올려놓아야 할 때, 큰 그릇이 필요하다. 큰 그릇이 좋다고 해서, 매 끼니 때마다 밥상의 그릇들을 죄다 큰 그릇으로 사용할 순 없다. 한두 스푼의 간장이 필요할 때는 반드시 작은 그릇이 필요한 법이다. 큰 그릇과 작은 그릇은 용도 자체가 다르다. 쓰임새가 다르다는 말이다. 서로를 필요로 할 때가 따로 있다. 그 둘은 모두 필요하다.
'멸치는 고래가 되려고 하지 않지.' 라는 문장을 좀 더 자세히 생각해보면, 실제로 멸치나 고래에게는 이런 생각 자체가 없을 수도 있다. 멸치가 고래가 되길 바란다거나, 반대로 고래가 자신의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큰 몸이 싫어서 차라리 멸치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거나 하는 건 어디까지나 인간의 관점에서 동물을 해석하는 것일 확률이 높다. 인간은 항상 자신에게 없는 것, 결핍을 채우길 원한다. 자기 자신이 가진 특성을 받아들이기보다는 더 좋아 보이는 것, 있어 보이는 것이 되고 싶어한다. 한양대 유영만 교수가 쓴 ‘나무는 나무라지 않는다’ 책에 나와있는 것처럼, 나무는 자기가 생겨난 자리를 탓하지 않는다. 그저 그곳의 환경에 맞추어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태어난 환경을 받아들이는 힘이 부족하다. 그 대신 난 왜 하필 이런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을까, 어째서 내 부모는 저런 사람들인 걸까, 왜 난 하필 첫째로 태어났을까, 끊임없이 이런 불평불만을 제기한다.
하지만 나의 존재 조건 자체도 다 나다. 야구공인 내가 축구공이 될 수 없고, 멸치인 내가 고래가 될 수 없듯이, 난 그냥 나일뿐인 것이다. 멸치로 태어난 내가 고래를 부러워하고, 고래가 아닌 것을 서운해하고, 고래가 되고 싶어 몸부림 친다면, 그건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소외시키는 잔인한 행위다. 내가 원하는 모습은 이게 아니었다, 이건 내가 아니다, 라고 자신을 부정하는 한, 자신의 고유한 특징을 깨닫고 그에 맞는 최고의 용도, 최고의 멋진 삶을 찾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내가 누군지부터 알아야 그 모든 게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의 모습과 자신의 특성, 자기가 태어난 환경, 자리를 수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초승달이 보름달이 되기 위해 있고, 아이가 어른이 되기 위해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의 의미도 잘 새겨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언제나 과정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목표를 이루고, 확실한 무언가가 되기 전까지는 아직 아무것도 아니라고 잘못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그래서 항상 지금 현재를 충실하게 누리며 살지 못하고, 늘 미래의 무언가를 쫓아가기에 급급하다. 사실 삶이라는 것은 서로 다른 매일을 어떻게 살았는지의 총합에 불과한 것인데도, 그 하루하루의 삶의 질은 따지지도 않고, 언제 어떻게 결과를 낼 것인가처럼 마치 삶이 한 판 승부인 것으로 착각한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냈다고 해서 삶이 거기서 아름답게 종결되는 것도 아니거니와, 매일의 삶은 그 이후에도 계속 된다. 목표를 이루어서 원하는 모습이 된 후에는 어쩔 것인가? 또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그것이 되기 위해 다시 달릴 것인가?
초승달은 초승달인 것이고, 반달은 반달인 것이고, 보름달은 보름달인 것이다. 우린 계속 변화한다. 초승달이어서 아직 되다만 달인 게 아니라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아이도 어른이 되기 위한 과도기에 있는 덜 자란 존재에 불과한 게 아니라, 아이는 아이만의 독특한 상태로 존재하다가 계속해서 변해갈 뿐이다. 매 순간이 다 의미 있고, 매 순간이 다 가치가 있고, 매 순간이 다 중요하다.
이 책의 메시지에 근거해서 오늘의 나를 살펴본다. 나는 대한민국 최고의 마음 치유자가 되어야만 가치가 있어지는 게 아니다. 지금의 나도 그 자체로 충분하다. 더 나아지려고 노력은 하겠지만, 그것이 꼭 뭔가가 되기 위해서는 아니다. 지금 하는 일이 좋고, 더 잘 하고 싶고, 관련 공부를 하는 게 재밌기 때문이지, 반드시 무엇이 되려고 하는 건 아니다. 난 지금도 내가 어떤 크기의 어떤 종류의 그릇인지 알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것부터 알아야 모든 기능을 다 활용할 것이 아닌가! 난 지금의 모습으로도 온전하고, 충만하며, 괜찮고, 좋다. 아직 무엇이 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지금 이대로 가장 아름답다. 나는 지금 존재하는 모습 그대로 완벽하다. 오늘의 나는 이미 완성형이다.
(* 마하쌤이 이 글을 직접 낭독하는 걸 보고 싶으신 분들은 유튜브에 가서 '마하쌤'을 검색해 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