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나의 적이 나를 성장시키곤 하죠. ('완벽해')

by 마하쌤
x9791189164454.jpg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검은 연필 검댕이 손에 묻어날 것만 같아서, 자꾸 손가락을 확인해보게 되고, 또 지우개 가루가 떨어질 것만 같아서 왠지 조심하게 되는 그런 책이다. 분명히 페이지 안에 가둬져 있는 그림인데도 불구하고 물성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아주 오래 전 얘기지만, 내가 학교에 다니던 무렵에는 볼펜보다는 연필과 지우개를 더 많이 사용했었다. 그리고 그 당시 나는 깨끗하게 지우는 것에 매우 집착했던 학생이기도 했다. 종이가 찢어지는 한이 있어도, 최대한 깔끔하게, 완벽하게 지워야 직성이 풀렸기 때문에, 심이 굵고 진한 연필보다는 잘 지워지는 흐리고 연약한 연필심을 선호했었다. 게다가 연필 자국을 지워낸 뒤에 더러워진 지우개가 보기 싫어서, 손으로 지우개에 묻은 검댕까지 때처럼 벗겨내기도 했다. 그랬던 시절이 있다 보니 이 책이 뭐랄까 훨씬 더 피부에 강렬하게 와닿았다.


자신의 주변을 완벽하게 깨끗하게 유지하고 싶어하는 지우개에게 있어서 연필은 귀찮고 짜증나는 존재일 뿐이다. 아무리 하지 말라고 말해도, 오히려 더 약 올리듯이 낙서를 하고 다니는 모습은 유치하기 짝이 없고, 지우개에게 순도 100%의 짜증과 분노를 일으킨다. 하지만 지우개의 근본 속성이 지우려는 것이듯이, 연필의 근본 속성은 쓰는 것이다. 지우개가 모든 걸 다 지우고 싶어하는 것과 똑같은 마음으로, 연필은 그저 모든 빈 곳을 채우고 싶어할 뿐이다. 둘 중 누가 옳고, 누가 틀리다고 말할 수 없다. 연필과 지우개는 서로 다른 것이다.


문제는 각자의 욕구가 너무도 상반되기 때문에, 그 둘은 결코 한 공간에 존재할 수 없는 천적처럼 느껴진다. 둘 중 하나만 존재하지 않는 이상, 영원히 부딪히고 싸울 수밖에 없는 적으로서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둘은 계속해서 싸운다. 지우개가 지우려고 하면 연필은 도저히 못 지우게끔 엄청나게 그려버리고, 연필이 아무리 많이 그려도 지우개는 이 악물고 박박박 지워버리고... 이 싸움은 둘 중 하나가 죽거나 사라지기 전에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이 책에서는 지우개가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먼저 쓰러질 확률이 매우 높았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환경으로 가득 찬 곳에서, 지우개는 자신이 가장 잘 놀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한다. 깨끗한 곳에서의 지우개는 할 일이 없지만, 연필심의 흔적으로 가득한 어두운 곳에선 자신 또한 연필심처럼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지우는 기능만 있는 줄 알았는데, 환경에 따라 그것이 그릴 수 있는 재능으로도 바뀔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마치 절벽에서 떨어지기 전까진 자신에게 날 수 있는 날개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어느 새처럼 말이다.


우리는 보통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이나 상황이 주변에 하나도 없기를 바란다. 아무도 나를 괴롭히거나 스트레스 주지 않는, 완벽한 stress-free 상황을 꿈꾼다. 그래서 나와 비슷한 사람들하고만 친구 관계를 맺고, 나와 다른 사람들은 애초에 배척해버리기 쉽다. 하지만 이 그림책에서 보듯이 나와 다른 누군가는, 내가 누구이며, 어떤 것을 할 수 있는지, 나의 정체성을 알려주는 거울이 될 수 있다.


2009년에 방송되어서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선덕여왕’을 보면, 미래에 선덕여왕이 될 주인공, 덕만의 가장 강력한 적인 ‘미실’이라는 존재가 나온다. 미실은 평생 동안 덕만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무시무시한 최강의 적이었지만, 덕만은 그런 미실에 대적하는 동안 여왕으로서의 자질을 기르면서 나날이 강해졌다. 결국 패배를 인정하지 못해 자살을 선택한 죽은 미실과 마지막 대면을 하는 장면에서 덕만은 이렇게 독백한다. “미실, 당신이 없었다면 난 아무것도 아니었을지 모릅니다.”


이 시대의 수많은 청년들이 지금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다. 이 그림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지혜란, 나와는 많이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를 더욱 더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는 사실인지도 모르겠다. 나에 대해 알기 위해 자신의 내면을 파들어가는 것도 물론 필요하겠지만, 나와 다른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그들과 잘 싸우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독특함, 남다름, 재능, 능력 같은 것들을 알아내는 것도 매우 중요할 것이다. 더 나아가 ‘공생’의 단계까지 이를 수 있다면 더 좋고!

keyword
이전 12화따로 또 같이, 어때요? ('똑, 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