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림책을 처음 봤을 때는 같은 날, 동시에 알에서 깨어난 똑이와 딱이기 때문에 그저 절친 관계일 거라고만 생각하고 봤었는데, 오늘 다시 보니 오리들의 각인 이론도 생각이 나고, 덩치 차이가 있어서 그런가 똑이가 엄마 같고, 딱이가 자식 같아 보이기도 했다. 사실 친구 관계가 아니라, 부모-자식 관계라고 해도 여전히 말은 된다. 이 작품은 모든 것을 함께 하던 사람들이, 자기만의 관심사를 찾아 서로 분리되면서 약간의 갈등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였다가, 결국 더 좋은 관계로 승화되는 ‘따로 또 같이’의 원리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변치 않는 사랑, 변치 않는 관계를 굉장히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연인들은 입버릇처럼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고 또 노래하지만, ‘변치 않는 영원한 사랑’은 없을 뿐더러 그런 사랑이 그다지 건강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관계가 영원하려면 반드시 변해야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변한다’는 말을 꼭 나쁜 것으로 받아들인다. 변심하고, 관계가 깨지고, 절교하고, 마치 어느 한쪽이라도 마음이 변하게 되면 관계는 반드시 파국을 맞게 되고, 결코 전과 같아질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이게 바로 잘못된 사고방식이다. 우리는 누구나 때가 되면 변할 수밖에 없기에, 서로의 그런 변화를 인정하면서, 같이 변해나가는 게 영원한 우정이요, 영원한 사랑이다. 하나도 안 변해서, 처음과 그대로여서 영원한 게 아니라, 어떤 모습으로 변하든지 간에 늘 함께일 수 있어서 영원한 것이다.
아마 이 책에서 가장 큰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는 장면이라면, 딱이를 찾아 헤매던 똑이가 다른 새들과 멀쩡하게 잘 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는 장면일 것이다. 얼마나 심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는지 “네가 어떻게 나 없이 이렇게 잘 놀 수가 있어!”라고 화도 낼 수 없고, 그저 자신의 충격받은 모습을 나뭇잎 뒤로 숨기기 급급하다. ‘똑이 없이도 딱이가 행복하다니, 어떻게 이럴 수 있죠?’로 표현되는 그 마음이야말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봤을 공통된 감정일 거라고 생각된다. 나는 아직 그대로인데, 상대방이 먼저 변해가기 시작할 때의 고통 말이다. 상대의 변심에 대한 배신감, 나는 그가 없으면 한시도 못 살겠는데, 정작 그는 나 없이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충격, 결국 그는 나를 버리고 떠날 것이라는 불안감, 두려움, 나는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내 뜻과 다르게 변해가는 것에 대한 공포,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회한 등등, 폭풍 같은 감정이 몰려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부분에서 ‘아, 이제 똑이와 딱이의 관계는 끝났구나!’하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새들과 신나게 놀고 난 딱이가 똑이를 찾아 헤매는 모습을 보라. 아까 똑이가 딱이를 찾아 헤매는 모습과 똑같다. 딱이는 변심한 것이 아니다. 딱이의 똑이에 대한 마음은 조금도 변함이 없다. 딱이는 그저 자신과 관심사가 더욱 비슷한 새들과 어울리는 것에 대한 새로운 즐거움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 즐거움에 대해 어서 똑이에게 다 말해주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딱이는 하나도 변한 게 없다. 그저 똑이 없이 혼자서 겪은 새로운 경험이 하나 생겼을 뿐이다. 만약 누군가와 모든 것을 함께 해야만 그게 진짜 사랑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겐 이것 자체가 큰 충격이자 고통일 수 있다. 나 없이 상대방 혼자서 즐겁거나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배신이라고 믿는 사람에게는, 딱이의 이런 행동이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재앙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그림책에선 새들로 표현됐지만) 누구나 때가 되면 자기만의 취향, 관심사, 스타일을 가질 수밖에 없고, 반드시 가져야만 한다. 우리는 세상에 하나뿐인 존재로서, 지독하게 고유한 자기만의 특성들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언젠가는 누구나 독립된 개체로서의 특징을 띄게 되고, 그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린 누군가와 어떤 것을 함께 할 수도 있지만, 혼자서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온전해진다. 절대적으로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것은 결코 건강하지 않다. 상대방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상대방이 없이는 절대로 즐거울 수 없다면, 그건 의존병에 걸린 것이지 건강한 독립체가 아니다.
이걸 부모-자식 관계에 대입해서 생각해보아도 마찬가지다. 아이가 나이가 어릴 때는 모든 것을 부모에게 의존하고, 부모의 보호 아래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신체 활동 범위가 넓어지고, 자기만의 생각과 호기심이 생기고 나면 어떤 아이든 간에 부모의 간섭 없이 혼자서 뭔가를 하고 싶어한다. 이것을 부모에 대한 배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떻게 감히 나 없이 너 혼자서 뭘 하려고 할 수가 있어!”라고 한다면, 이 말이 정상적이라고 느껴지는가? 아니다. 사람은 때가 되면 자기 혼자 스스로 뭔가를 해낼 수 있어야 하고, 자기만의 고유한 특성을 갈고 닦아야 한다. 그래야만 결과적으로 다른 누군가와도 잘 어울려 지낼 수 있다. 자기만의 뭔가가 없는 사람은 늘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에 따라 움직이고, 그들의 감정에 치여서 자기가 뭘 원하는지조차 모르고, 다른 사람의 생각대로 살고, 옆에 누가 없으면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딱이는 그런 면에서 똑이보다는 확실히 좀 더 진취적인 인물이었던 걸로 보인다. 죄책감 없이 똑이 외의 친구들과도 어울릴 줄 알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똑이는 자기 없이도 혼자서도 즐겁게 잘 지내는 딱이에게 서운함을 느꼈지만, 그렇게 본의 아니게 혼자 남겨진 상황 속에서 드디어 똑이도 자신만의 즐거움을 발견하게 된다. 똑이와 딱이는 서로 이야기하고, 함께 노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들이 좋아하는 일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그걸 억지로 똑같게 만들 것이 아니라, 따로 또 같이!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충분히 즐긴 다음, 그것을 함께 이야기하는 것으로 여전히 함께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들은 여전히 단짝이고, 서로에게 최고의 친구이고, 늘 함께인 것이다.
이 그림책의 결론은 ‘따로 또 같이’의 아름다운 결론을 보여주지만, 현실에서는 대부분 어느 한쪽이 이 결론을 수용하지 못해 파국에 이르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누군가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라고 말한다면, 그렇게 말한 사람이 자기가 원치 않는 변화를 수용하는 능력이 상당히 떨어져 있을 확률이 매우 높다. 물론 불륜이라던가, 사기라던가, 이런 고의적인 악행을 당하면 당연히 이런 반응이 나올 수 있다. 그런 변화는 그 누구도 원치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때부터는 인생의 또 다른 거대한 원리가 적용되어야 한다. 삶의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자기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진 않는다는 것 말이다. 내가 원치 않아도 생기는 일은 얼마든지 널려 있다. 그런 일 하나하나에 대해서 매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라고 분노하고 발끈한다면, 엄청나게 피곤한 인생이 될 것을 감수해야 한다. 모든 게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당신이 옳다고 믿는 대로 되어야 하는 건 아니다. 안타깝지만 그게 사실이다. 그래서 이 삶의 어찌할 수 없음에 대해 내가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할 것인가가 가장 중요하다. 삶에 대해 당신이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가 당신의 삶의 질을 결정한다. 그리고 삶에 대한 그 태도는 당신이 선택할 수 있다. 그것이 인간이 가진 가장 큰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