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다르답니다. ('적당한 거리')

by 마하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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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의 관계에서 가장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적당한 거리’이다. 하지만 서로 원하는 것이 다르고, 기대감의 크기가 다르고, 도덕적, 윤리적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사람 사이의 역학 관계는 너무 여러 가지가 얽혀있어서 복잡하고 어려워 보인다. 어쩌면 그래서 이 그림책에서처럼 식물을 통해 ‘적당한 거리’의 실체를 파악한 후, 실제 인간관계에 적용해보는 것이 유용한 방법일 수도 있다. 보통 어린 아이나 식물, 동물처럼 비교적 단순한 관계에서 그 원리가 더 잘 보이기 때문이다. 전소영 작가도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림책 표지를 보면 왼쪽엔 식물이, 오른쪽엔 그 식물 무늬의 옷을 입은 사람이 그려져 있다. 결국 둘을 같은 개념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제일 먼저, 이 그림책은 ‘싱그러운’ 인간관계를 만들어가기 위한 방법을 말해주고 있다. ‘싱그럽다’는 건, ‘싱싱하고 맑은 향기가 있다’는 뜻이다. 딱 봐도 생기가 넘치고 건강한 모습, 거기에 좋은 향기까지 나는 관계라니, 얼마나 보기 좋고, 아름다운 모습일까! 작가는 그런 싱그러운 관계의 비결이 바로 ‘적당한 거리’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 적당한 거리를 찾기까지는 엄청나게 많은 관찰과 돌봄이 필요하기에, 결코 쉽진 않다고 미리 얘기한다.


각 식물들마다 성격이 다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식물에 대해 미리 공부할 필요가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에 대해 많이 아는 것이 관계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너무도 중요한 이유는, 뭘 알아야만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 자기 기준에 따라서 필요한 것을 정하는 버릇이 있다. 내가 이걸 좋아하면 다른 사람도 이걸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고, 나한테 이게 필요하면 다른 사람도 이게 필요할 거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나는 물이 많이 필요한 활엽수이지만, 상대방은 물이 별로 필요 없는 선인장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내게 가장 좋은 것을 상대방에게 퍼부어주면서, 그게 가장 큰 사랑이라고 느끼겠지만, 상대방 입장에서는 독을 퍼붓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주는 무언가는 오히려 좋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다. 뭘 주기 전에, 뭔가 해주기 전에, 먼저 그 사람에 대해 많이 알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걸 반대로 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그 사람에게 잘못된 사랑을 주어서 그 사람을 망쳐놓은 후에야 뒤늦게 이게 아니었구나를 알게 되는 것이다. 자식 잘 되라고 엄하게 키웠는데, 그 바람에 아이가 애정결핍이 되어버린 사례들은 너무도 많다. 허브들처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면, 아름다운 향기를 내뿜었을 아이들을 말이다. “그렇게 모두 다름을 알아가고 그에 맞는 손길을 주는 것. 그렇듯 너와 내가 같지 않음을 받아들이는 것. 그게 사랑의 시작일지도.”


그렇기 때문에 “다른 애들은 다 공부 열심히 하는데 넌 왜 이 모양이냐?”라든가, “다른 애들은 이렇게 해주면 다 좋아하는데, 너는 왜 불만이냐?” 같은 말들이 애초에 성립이 안 되는 것이다. 식물들이 다 다르듯이 아이들도 제각각 다 다르다. 누군 밖에 나가서 뛰어 놀기를 좋아하고, 누군 집에 앉아서 책 읽기를 좋아한다. 그런데 책 보는 애한테는 너도 밖에 나가서 좀 뛰어 놀라고 하고, 뛰어 놀고 싶어하는 애한테는 집에서 책이나 보라고 한다. 내 아이의 문제일 때는 애가 활동성을 길러야지요, 애가 공부도 좀 해야지요, 라고 쉽게 이유나 핑계를 대곤 하지만, 아이가 아니라 식물이라고 생각해보라. 음지에서 서늘하게 키워야 할 식물을 그늘 하나 없이 해가 쨍쨍 내리쬐는 운동장에 내다놓는다고 하자. 그럼 그 식물이 어떻게 되겠는가? 반대로 뜨거운 해를 쬐면서 물도 많이 먹어야 쑥쑥 잘 자라는 식물을 커텐 친 방구석에 놓아둔다고 하자. 금방 생기를 읽고 축축 늘어지지 않겠는가? 이처럼 식물일 때는 너무도 명확한 얘기가 사람의 경우로 옮겨가면 윤리적, 도덕적 기준 때문에 마치 굉장히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로 탈바꿈하곤 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아닌 건 아닌 것이다. 내 아이에게 맞는 방식이 다 따로 있는 법이다. 부모의 역할은 그걸 발견하고 찾아내서, 그에 맞는 돌봄을 주는 것이지, 무조건 자기가 자라온 환경처럼, 혹은 자기가 원했던 환경에서 키우는 게 아니다. 그건 사랑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부모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당신의 자녀에 대해 얼마나 많이, 제대로 알고 있습니까?”


특히 부모가 가장 하기 어려워하는 부분이 바로 가끔은 가지치기를 해줘야 한다는 것과 분갈이를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삶에서 더 큰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가지고 있던 것을 과감히 내려놓아야 할 때도 있고, 애써 만들어낸 것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더 성장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토대를 더 넓은 곳으로 옮겨야 할 때도 있다. 가정이라는 좁은 울타리 안에만 있던 아이가 지방으로, 혹은 해외로 나갈 수도 있고, 아니면 결혼을 통해 더 넓은 의미의 가족 관계로 나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모든 상실과 변화를 받아들여야만 이후에 성장이 있기 마련인데, 많은 부모들이 이 과정을 너무 힘들어하고, 자식이 자신의 작은 화분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만에 하나 반드시 가지치기를 해야만 하는 그 가지가 부모라는 구속일 경우, 다르게 표현하자면 성장을 위해 아이가 꼭 이뤄내야 하는 것이 부모로부터의 심리적 독립일 경우, 그걸 받아들이기 매우 힘들어한다. 나는 그 순간이 바로 자신이 누굴 사랑하는지 알게 되는 깨달음의 순간이라고 본다.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아이의 성장을 위해 자신을 가지치기 할 수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만약 절대 그럴 수 없다면 자문해야 한다. 과연 나는 정말로 아이를 사랑한 건지, 아니면 나 자신을 위해 아이를 사랑한 것인지 말이다.


식물이 아이와 다른 점이 있다면, 식물은 어쨌거나 스스로의 힘으로는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화분을 옮겨놓는 것부터 관리하는 것을 다 해줘야 하지만, 아이는 혼자서도 얼마든지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사실상 식물보다 도움이 덜 필요한 능동적인 존재이다. 식물보다 혼자서 다 알아서 할 수 있는 독립적인 주체라는 얘기다. 따라서 아이가 미성년일 때는 화분처럼 돌본다 하더라도, 아이가 성년이 된 이후에는 아예 내 손을 떠나보내야 한다. 그게 식물과 아이의 결정적인 차이이자, 더 어려운 점일 것이다.


식물은 잘 자라게 해주는 것, 성장을 돕는 것만이 전부이다. 그저 매일 매일 조금씩 더 잘 자라게만 해주면 된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떨까? 사실 원리는 동일하다. 인간도 식물과 똑같이 매일 매일 조금씩 더 성장하게 도와주면 된다. 얼마나 어디까지 자랄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저 때때로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면서 곁에 있어주면 된다. 식물이든 사람이든 싱그럽게 자라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 더 기분 좋은 일이 또 있을까? 나도 이제부터 ‘사람을 싱그럽게 키우기’를 새로운 모토로 삼아도 좋을 것 같다.


(*마하쌤이 이 글을 직접 낭독하는 걸 보고 싶으신 분들은 유튜브에 가서 '마하쌤'을 검색해 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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