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럼피우스"(바버러 쿠니 글, 그림/시공주니어)

by 마하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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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미스 럼피우스’는 책 속에 나오는 루핀 꽃들의 색깔이 예뻐서 산 책이었다. 특히 푸른색과 보랏빛 루핀 꽃의 색감이 마음에 들었다. 물론 책의 내용도 읽긴 했으나, 그림책치고는 글밥이 많은 게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그래서 대충 읽고, 내용만 파악한 채 내버려두었다. 그러고 보니 이 책은 그림책을 사기 시작했던 꽤 초창기에 샀던 그림책 중 하나였던 기억이 난다.


글을 쓰기 위해 처음으로 진지하고 꼼꼼하게 다시 읽었더니, 의외로 이 책에서 감정 이입이 된 부분은 루핀 부인이 평생 싱글이었다는 것, 그녀의 귀밑머리가 하얗게 세기 시작하는 모습, 그리고 그녀도 허리가 아프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게 나랑 비슷했다. 그녀의 부모나 형제가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오직 조부모의 곁에서 자랐다는 것도 일일이 다 설명하지 않는 가족의 문제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어렸을 때부터 혼자 조부모에게 맡겨졌던 것일까? 무슨 사연일까? 맨 나중에 ‘고모 할머니’로 불리는 걸 보면, 다른 가족이나 친척도 분명히 있다는 얘기일 텐데 말이다. 어쨌든 조부모 사망 후, 혼자 독립해서 원하는 삶을 살다가, 다시 바닷가에 집을 마련해서 말년을 보내는 모습이 대단하다 싶었다. 적어도 미스 럼피우스는 독립적이었고, 혼자 자기만의 삶을 개척해나갈 수 있는 경제적 능력도 있었다는 소리니까.


하지만 그녀의 인생 계획이라던가, 해야 할 일 같은 것이 전부 다 할아버지에게 전수받은 것이라는 점에서 살짝 아쉬움이 든다. 물론 어린 시절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쳤던 사랑하는 할아버지처럼 살고 싶은 마음, 매일 밤 할아버지 무릎에서 들었던 이야기에 홀딱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 그것보다 좋은 것을 알지 못했던 것, 다 이해는 하지만 말이다. 이 정도로 원하는 걸 다 이루면서 살 수 있었던 독립적인 여성이 어째서 자기만의 꿈을 갖지는 못한 건지 의아하다. 할아버지처럼 먼 나라에 나가보고, 바다가 보이는 집을 사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을 하나 하고, 다 좋다. 하지만 그럼 미스 럼피우스만의 꿈은 무엇인가? 그녀가 그토록 다양한 세상 경험을 하면서 느낀 것은 무엇인가? 본인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더 무서운 것은 미스 럼피우스를 ‘고모 할머니’라고 부르는 조카 녀석도 지금 또 미스 럼피우스와 똑같은 삶을 살겠다고 하고 있지 않느냐 이 말이다. 아, 물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은 특정해서 말해준 게 아니라서, 그건 자기 버전으로 생각해내고, 창조해낼 수 있다 치자. 먼 나라에 가는 일은? 바닷가에 집을 사는 일은? 왜 꼭 그렇게 해야 하는데? 산 속에 집을 사면 안 돼? 꼭 먼 나라를 여행해야 해? 나는 누군가에게 강한 영향력을 끼친다는 게 살짝 무서워지기도 한다. 특히 그걸 듣는 사람이 자기만의 생각, 자기만의 견해가 없는 사람일 경우, 개인의 특성과 상관없이 나도 저렇게 살아야겠다고 아무 생각 없이 전부 흡수해 버리고, 또 성실하고 약속 잘 지키는 사람의 경우, 반드시 그렇게 살아내는 걸 목표로 삼고 정말 그렇게만 살기도 하기 때문이다. 막말로 다른 나라에서 만난 남자랑 눈 맞아서 사막에서 같이 오두막 짓고 살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나는 할아버지처럼 반드시 바다가 보이는 집에서 살 거예요, 이렇게 말한다면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나는 이것이 할아버지에게 사로잡힌 거라고 생각한다. 할아버지가 아무리 좋은 사람이고, 멋진 사람이고, 본받을 만한 사람인지 그런 건 상관없다. 할아버지는 할아버지고, 미스 럼피우스는 미스 럼피우스다. 그 둘의 삶은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호호 할머니가 된 미스 럼피우스의 방을 보라. 할아버지, 할머니의 집에 걸려있던 그림들이 고스란히 걸려있다. 물론 자신이 여행하면서 얻은 물건들도 추가해놓긴 했지만, 이미 죽고 없는 그들의 자장 안에 미스 럼피우스의 삶이 있음이 나는 불만스럽다.


그런데 글을 쓰면 쓸수록 어떻게 보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나 또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아빠가 쓰시던 책상을 물려받을 것이고, 엄마가 쓰시던 그릇들을 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기념품이고, 물건이지만, 내가 엄마, 아빠의 꿈까지 물려받는 건 아니다. 부모가 어떤 모습으로 살았건, 어떤 삶을 훌륭하다고 생각했건 간에, 그건 그들의 생각, 그들의 판단, 그들의 삶이었을 뿐이다. 거기서 배울 게 있으면 배우고, 따를 게 있으면 따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도 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똑같은 꿈을 꾸며 살진 않을 것이다. 그건 애초부터 그렇게 될 수가 없는 일이다.


이 그림책을 쓴 바버러 쿠니가 어쩌면 책 속에 나오는 미스 럼피우스의 조카일지도 모르겠다. 그냥 가상의 스토리일 수도 있고.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그녀는 이미 아름다운 그림책을 만드는 것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을 하고 있으니, 제발 먼 나라를 여행하고, 바닷가에 집을 사는 일에 집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건 그냥 어려서 아무것도 모를 때, 그저 미스 럼피우스의 얘기를 듣는 게 너무 환상적이고 멋져서, 그게 제일 좋은 것일 줄 알 때나 가능한 거고, 본인에게는 미스 럼피우스가 겪은 세상 경험보다 더 다양하고 멋진 경험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걸 알고, 또 다른 꿈, 자기만의 꿈을 꾸었으면 좋겠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을 산 이유가 루핀꽃의 아름다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책을 다시 읽으면서 온 동네를 루핀 꽃 천지로 만들어버리는 미스 럼피우스의 행동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물론 루핀 꽃은 예쁘다. 하지만 루핀 꽃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켜켜이 위로 올라가는 꽃 모양들이 징그럽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런 빛깔들 보다는 빨갛거나 노란 더 밝은 색의 꽃들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그러거나 말거나 온 동네가 마치 자기 땅인 듯, 하루종일 돌아다니면서 루핀 꽃씨를 뿌려버리는 것은 너무 자기 중심적이지 않는가 이 말이다. 자기 눈엔 루핀 꽃이 제일 예뻐서 그랬다 해도, 세상 천지를 다 자기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걸로 채우는 게 그게 과연 옳은 일일까? 나는 동네 사람들이 미친 할매라고 욕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뭐라 막을 수도 없고, 나중에 루핀 꽃을 다 뽑아버리려면 또 얼마나 힘든 것인가!


미스 럼피우스, 나는 그녀가 할아버지의 꿈을 따라 산, 의외로 매우 의존적이고 집착적인,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많은 나라를 여행하면서도 여전히 하나의 꿈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도 놀라울 뿐이다. 생각의 외연이 넓어지기보다는, 그저 할아버지처럼 되기 위해 여기저기 여권 도장 찍듯이 다닌 것 아니었나 의심이 된다. 히말라야 산에서 뭘 배웠나? 사막에선 무엇을 보고 느낀 것인가? 그 많은 살아있는 경험들 속에서 할아버지로부터 주입한 꿈을 변경할 만큼의 색다른 무엇을 하나도 느끼지 못했단 말인가? 그 어떤 것보다 할아버지의 삶이 더 위대하다고 생각했던 것인가? 나는 솔직히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난 뒷맛이 씁쓸하다. 이토록 멋진 여성이 평생 자기만의 꿈을 꾸지 못했다는 점이 너무나 슬프고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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