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한 내용이었다. 덩치가 크기로 유명한 두 동물, 하마와 코뿔소가 좁은 길에서 만났다. 누구 하나는 옆으로 비켜줘야만 계속 나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둘 다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반드시 누구 하나가 먼저 비켜야 한다면, 그건 절대 자기는 아니라는 입장이었다. 둘은 계속해서 서로의 입장이 확고함을 재차 확인했다. 절대 양보할 의사가 없었다. 보통 이렇게 되면 끝도 없는 평행선, 발전 없는 정체가 이어진다. 타협이라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 경우엔 누구 하나가 반드시 물러나야 하기 때문에, 중간 지점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가 먼저 비켜서던가, 아니면 계속 그러고 있거나, 두 가지 경우의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항상 양보가 미덕이라고 배웠다. 착한 사람이 늘 먼저 양보했고, 자신의 희생을 조금은 감수하는 사람이 있어야만 이 세상이 원활하게 돌아갔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강자가 되기 위해선 더 오래 고집을 부리고 버텨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차피 버티다 보면 좀 더 약한 쪽이 결국 양보하거나 무너질 테니까. 역설적으로 진짜 강자임을 증명하려면 절대 양보하거나 약해져서는 안 되게 되어버린 것이다. 한 덩치 하는 하마와 코뿔소도 그런 걸 알고,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존심을 건 한 판 승부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보면서 영화 ‘두 교황’이 떠올랐다. 교황 베네딕토 16세와 교황 프란치스코의 실화를 다룬 영화였는데, 가끔은 정말로 양보할 수 없는 주장을 가지고 대치할 수도 있다. 정반대의 생각, 절대 교집합을 찾을 수 없는 극단적으로 다른 주장, 그것도 단순히 누가 길에서 비켜날 것인가 같은 사소한 수준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 가치나 의미에 관한 아주 크고 무거운 주제일 수도 있다. 그들도 하마와 코뿔소처럼 한 치의 양보 없이 대립할 수 있다. 양보하면 주장을 포기하는 것이고, 그럼 그들이 대표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다같이 고통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냥 똥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라, 큰 사상을 대표하면서, 인류의 사활을 걸고 하는 대치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위협도 해보고, 협박도 해보고, 힘자랑도 해보다가, 피차 물러설 의지가 전혀 없음을 여러 차례 확인한 하마와 코뿔소는 결국 자리에 앉아 풀 한 병을 같이 나눠 먹고, 어디로 가는 길이었는지 서로의 얘기를 들어보고, 심지어 함께 춤을 추기도 한다. 앞이 막혀서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으니,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런 것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하마와 코뿔소가 정말 놀라운 것은 서로 자기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내가 왜 여길 지나가야 하는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내가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지, 그래서 왜 네가 비켜주는 게 맞는지 등등, 쓸데없는 입씨름을 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비키고 싶어하지 않는 것처럼, 너도 똑같이 비키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 마음을 서로 인정했다. 누가 누구보다 더 중요하거나 하는 게 아니라,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음을, 그리고 그것이 똑같이 중요함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아마 이게 되지 않았다면, 말 그대로 몸싸움, 개싸움, 서로를 할퀴고 물어뜯으려고 했을 것이다. 자기의 힘과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서. 그러면 아마 서로 피를 흘리며 만신창이가 되었겠지. 힘이 비슷하니까 어느 쪽도 길을 뚫고 나가지도 못했을 거고. 그렇다. 같은 상황에 처한다 하더라도, 결과는 완전히 반대로 나타날 수도 있었다.
그럼, 그들이 결과적으로 서로 비켜주지도 양보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이 둘은 여전히 평행선이요, 발전 없이 정체되어 있다고 봐야 할까? 아니다. 이 둘은 비록 끝까지 양보는 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상대방의 입장을 좀 더 이해하게 되었다. 그게 꼭 내가 양보할 거라는 얘긴 아니지만, 상대방 또한 왜 양보할 수 없는지 그 이유를 납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면 서로에 대한 존중이 생긴다. 게다가 이 둘은 어째서 양보할 수 없는지에 대한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 서로의 처지에 대해 가장 잘 공감할 수 있다는 얘기다. ‘두 교황’에서도 그랬다. 이 둘은 서로 다른 생각과 의견으로 언뜻 보면 대척점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같은 ‘교황’으로서 그 누구보다도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이해할 수 있는 존재들인 것이다. 그래서 풀을 나눠먹을 수도 있었고, 함께 춤을 출 수도 있었다.
이분법적인 사고로 생각한다면, 이 문제는 풀리지 않는 숙제다. 양보하거나, 양보하지 않거나. 앞으로 나아가거나, 못 가거나. 이 두 가지 결론밖에 없다고 단정내리기 쉽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 하마와 코뿔소는 제 3의 솔루션을 제안한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해도 좋다. 최소한 그들은 소통하기 시작했다. 누구 하나가 이기고 지는 결론이 나진 않았지만, 둘의 의견이 모두 중요하고 일리가 있다는 걸 이해하기 시작했다. 다음에 만나면 또 대립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들은 여전히 한 마음으로 춤을 출 수 있고, 가진 것을 나눌 수도 있다. 이것은 엄청난 변화다. 변하지 않는 것 같이 보일 수도 있지만, 정말 많이 변한 것이기도 하다. 대립되는 상황일 땐, 대립한 채로 있어도 좋다는 걸 말해주는 것이다. 꼭 대립이 해결되야만 결론이 아니라, 대립된 채로 공존하는 것 또한 또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내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내 앞길에 방해가 된다고 해서 무조건 미워하고, 제거하고, 싸우려고 하지 말고, 그 상태로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계속 부딪히고, 계속 만나면서 우리는 또 다른 길을 모색할 수도 있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숲에 지각 변동이 생기면서 비좁아서 오직 한 명만 지나갈 수 있는 그 길이 둘이서 같이 지나갈 수 있도록 넓어질 수도 있고, 서로가 동시에 먼저 가라고 양보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고, 또 상상도 못했던 기발한 방식으로 그 길을 모두 지나갈 지도 모르는 일이다. 반드시 이게 아니면 안 된다는 꽉 막힌 생각, 오히려 그것이 우리 모두를 좁은 사고에 몰아넣고, 그것을 더없는 고통으로 느끼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이분법적 사고의 단순한 틀을 넘는 새로운 솔루션의 발견이다! 유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