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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이음 Nov 10. 2020

육체와 정신, 그 어디쯤의 나약함.

-나약함은 장애와 상관없습니다.

 유명인과 인연이 있다는 것은 한 사람의 범인으로서 괜히 자랑스러울 때가 있다. 정말 스치듯 잠깐의 인연인데도 말이다.      


 봉사활동에 온 열의를 다 쏟고 있던 시기의 일이다. 사람들을 향한 이타심이나 봉사정신이 유독 투철해서 봉사활동에 열의를 쏟았던 건 아니었다. 질풍노도의 20대 시절이었기에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있었다. 나는 그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 자체에 위로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불순한(?) 이유로 봉사활동을 열심히 다니던 중 성북구에 위치한 시각장애인 복지관에서 악기 선생님을 모집한다는 이야기를 지인을 통해 듣게 되었다. ‘시각장애인이 어떻게 악기를 연주할까?’ 근본적인 호기심이 나를 그곳으로 이끌었다.     


 처음 레슨의 시작은 봉사자들의 팔을 잡고 들어오는 남자아이 두 명이었다. 솔직히 보자마자 난감했다. 후천적으로 시력을 잃은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보이지 않는 채로 태어난 아이들에게 악기 연주법에 대해 설명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기 때문이다.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는 아이 둘을 넋을 놓고 바라봤던 기억이 있다. ‘에라... 모르겠다’ 하는 마음으로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하자 한 아이가 계이름을 줄줄 읊는다. 심지어 음정이 조금 높은 것 같다고 조언까지 했다.     


 나는 그때 절대음감인 사람을 처음 봤다. 음악을 전공한 사람들이 음정을 잘 듣는 건 맞지만 그들이 모두 절대음감이어서가 아니라 거의 대부분 지독한 훈련에 의해서 습득되어진 경우가 많다. 음정을 머릿속에 각인한다고나 할까.     


 반면 남자아이는 사물에서 나는 소리의 음정까지 구분해 내었다. 앰뷸런스에서 나는 소리나 사람의 목소리도 음정을 잡아내었다. 두 명 중 한 명의 아이만 뛰어난 청각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한 명의 아이에게는 악기를 장난감 마냥 가지고 놀게 내버려 두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시간이 지나자 악기를 만져가면서 수업에 따라오기 시작했다. 시각장애에 대해 무지한 대책 없는 선생님의 지도 아래에서도 아이들의 연주 실력은 향상되어갔고 연주회까지 계획하게 되었다. 

    

 연주회를 목표로 아이들과 함께 수업을 이어나가고 있던 때였다. 피아노 선생님이 오셨는데 인사를 하라는 복지관 선생님의 안내로 ‘그분’을 처음 만났다. 그분은 아이들과 같이 시각장애를 가진 선생님이셨는데 복지관에 악기 선생님 중에 장애를 가진 분이 오신 건 처음이었다. 신기한 마음 반 궁금한 마음 반으로 레슨실을 방문했고 치마 정장을 잘 차려입은 여성분이 피아노 앞에 앉아계셨다.      



“아.. 안녕하세요.”     



성인 시각장애인과 인사를 해본 적이 아마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네. 안녕하세요.”          



 또랑또랑하고 다부진 목소리가 내 귀를 지나갔고, 그녀 옆의 커다란 강아지가 나의 시선을 끌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안내견이라는 존재가 흔하지 않았던 때고 골든 레트리버라는 종을 도시 한복판에서 만나는 일도 드물었던 시기였다. 그렇게 신기한 마음과 궁금한 마음이 섞여 나도 모르게 그녀의 레슨 방을 종종 훔쳐보게 되었고 그녀는 그때마다 참 모든 것에 열심히였다.     


 악보를 볼 수 없는 그녀는 아이들 레슨이 끝나고 다음 아이들을 기다리는 그 잠시의 찰나에도 음악을 반복적으로 들으며 틈틈이 피아노 연습을 했다. 연습은 조용한 연습실에서 집중할 수 있는 시간에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내가 한없이 작아지는 순간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있던 시기였고 타인에게 먼저 친근하게 말을 걸어보겠다는 용기도 없을 시기여서 그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인사 정도만 겨우 하던 나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복지관 선생님께서 저녁식사를 사주신다고 해서 그녀와 내가 처음으로 사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그녀는 나와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없었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는지, 연습은 평소에 얼마나 하는지, 입시 준비는 어떻게 했는지. 궁금한 게 참 많았다. 음식점으로 가는 길에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다 기억이 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제법 재잘재잘 떠들었던 것 같다. 그렇게 재잘거리며 복지관 근처 칼국수 집을 찾았다. 추운 날씨에 딱이라고 생각했다. 주인아주머니가 우리를 보자마자 손사래를 치기 전까지 말이다.          



“어휴! 음식점에 개를 데리고 오면 어떻게 해요. 나가요!”    


      

순간, 머리가 띵했다. 아주머니 표정은 정말 싫다는 표정이었고 나는 중간에서 그대로 얼어버렸다. 음식점에 들어가면 의례 듣던 소리는 “몇 분이세요. 저기 앉으세요. 들어오세요.”였다. 식당에 들어오자마자 나가라는 소리를 들을 줄이야.     


 복지관 선생님은 침착하게 아주머니를 달래기 시작했고, 나는 그들 뒤에서 멍하게 서 있었다. 가게 안에는 손님이 한 사람도 없었고 우리는 몹시 배고팠다. 이 모든 상황이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슬펐고 화도 났지만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볼 용기가 나질 않았다.     


 복지관 선생님이 계속 설명해보셨지만 아주머니는 점점 더 화를 내셨고 언성을 더 높이셨다. 그쯤 되자 나는 빨리 식당을 나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 애는 그냥 개가 아니에요!”         


 

 내가 얼굴을 붉히며 아무 말 없이 서 있었을 때, 그녀가 갑자기 그렇게 크게 외쳤다. 아주머니는 그녀의 외침에 잠시 움찔했지만 이내 다 필요 없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복지관 선생님과 아주머니 그리고 그녀의 입씨름 소리가 한동안 오갔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쫓겨났고 한참을 말없이 걸었다. 너무 지쳐서도 그랬지만 그것보다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한 사람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을 보면서도 손 한번 내밀어 주지 않은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서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복지관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그만두었고 나는 그녀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세월이 한참 지나 그녀의 존재를 아예 잊고 있었을 때, 국회의원 비례대표 당선 기사를 통해 그녀와 다시 조우했다. ‘음악을 하던 사람이 어떻게 국회의원이 됐을까?’ 싶다가 그때 아주머니에게 대들던 그녀의 모습이 생각났다. 어쩌면 정말 그녀 다운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그동안의 그녀의 행보가 궁금하여 기사를 찾던 중 한 정치가가 그녀에 대해 "선천적 장애인은 정말로 어려서부터 장애를 가지고 나오니까 의지가 좀 약한 사람이다"는 말을 했다는 글을 봤다. 인터넷에 떠도는 글들이 다 사실이라고 믿지는 않지만 그래도 만약 그분이 진짜 그런 말을 했다면 십수 년 전에 그녀 뒤에서 아무 말 못 하고 서 있던 나라는 사람은 선천적 장애도 없고 육신이 참 건강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인간의 나약함이 과연 육체만의 문제일까?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손을 내미는 일이 얼마나 큰 용기인지 몰랐던 어린 나날이 지나고 누가 봐도 어른의 나이인 나는 그때와 달리 용기 있는 사람이 되었는지... 그녀의 기사를 보며 반성해본다.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시대에 사는 나약한 각각의 인간이 서로에게 손을 내미는 것은 어쩌면...정말 위대한 일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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